카드기로 돈을 긁으며 느끼는 대리만족

by 최물결

카드기로 돈을 긁으며 느끼는 대리만족

퇴사를 하고 오전 아르바이트를 하며 얻게 된 소소한 자유들이 나를 신나게 했다. 먼저 낮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 두 번째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끝이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 일들은 무의미하지 않았고 새로웠으며 생소했고 글을 쓰는 나에게 좋은 원료가 되게 해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학원은 무수히 다녀왔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 국비로 학원을 다녔는데 흔히 학원에 등록할 때 먼저 상담을 하게 되는 데스크 선생님이라고 하는 선생님들의 역할이 바로 나였다. 솔직히 학원 데스크 아르바이트는 별 것 없이 쉬울 줄 알았다. 내가 봤던 데스크 선생님들의 모습은 앉아 있다가 시간을 알려주거나 전화할 때면 다정하게 전화를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를 찾을 때도 학원 데스크직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없다고 쓰여 있는 공고 또한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는 법이었다.


막상 내가 학원 데스크 실장님이 되니 많은 난관들이 부딪혔다. 학원 규정에 맞지 않게 억지를 부리는 학부모님, 우리 아이만 편의를 봐달라는 학부모님 등 골치 아픈 전화들이 꽤 많이 걸려왔다. 그때그때마다 센스 있게 전화를 받아야 했고 원장님의 컨펌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중간다리 역할을 잘해야 했다. 뿐만 아니었다. 학원에서는 작은 아이들의 몸싸움이며 말다툼 때문에 걱정하는 학부모님부터 해서 상담전화는 물론 학원시간, 교재, 보충시간 등 문의하는 자잘하게 숙지해야 할 내용들이 참 많았다. 그 와중에도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주는 학부모님들, 고생한다고 빵을 사 와 건네시는 할머니도 계셨다. 힘들기도 했지만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때 ‘아 이래서 아이들은 아이들이구나’를 느낀다.

학원에서 제일 바쁜 날은 학원비 결제가 있는 날, 특강이 열리는 날이다. 처음에 나는 누군가의 카드를 긁는다는 것도 무서웠다. 한 번도 계산해본 일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더 그랬다. 그리고 오전 아르바이트라서 결제할 일은 없을 거라고 해서 계산하는 법을 숙지하기만 해 놓았지 한 적은 없었다. 하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학원이 바빠지면서 오전에도 결제를 하는 어머니들이 오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음속으로 일이 늘어나지 않기를, 오늘은 내가 결제하지 않기를 이라고 주문을 외우며 버텨봤다. 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기계치이긴 하지만 열심히 매뉴얼을 눌러가며 연습을 했다. 남들은 쉽게 하는 새로운 것들에 겁을 먹고 피하기만 했나 싶은 순간이었다. 그냥 해보면 되지 왜 안 하고 살았을까? IC카드를 꼽고 50만 원을 입력했다. 사인을 받고 영수증을 주욱 당겨 자르니 쓱 소리와 함께 카드 영수증이 발급되었다. 숫자만 확인 잘하고 하면 되는 거였다. 은연중에 남의 카드를 조심히 긁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계산업무 하는 일은 못한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한번 하니 달랐다.





대리만족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큰돈을 한 번에 결제하지 못한다. 50만 원을 결제한다고 해도 어떻게 할부를 끊어야 하나?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그런 내가 다른 사람의 카드를 계속 결제하다 보니 대리만족을 느낀다. 카드를 꽂고 금액을 입력해서 결제창에서 승인 표시와 함께 영수증이 나온다. 사실 두려워서 제일 어려워했던 결제 업무를 재밌다고 인식하게 되면서 다른 자질구레한 일들도 ‘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전환됐다. 매뉴얼은 익히면 되고 못하는 것은 배우면 되고, 안 한 것은 해보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손으로 만지지 못하는 금액들을 손에 쥔 것처럼, 내 돈인 것처럼 누른다. 제법 숫자에 익숙해진 내 모습이 왠지 모르게 기특해 보이는 건 왜일까. 카드기를 누르는 손끝마다 새로운 용기의 날개가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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