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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Apr 13. 2021

우리 집 아닌 우리 집이지만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권리

-주체할 수 없이 억울한 마음

엄마가 돌아가신 뒤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이모만 셋이었던 집의 셋째 딸이었다. 큰 이모는 4년 전에 돌아가셨고, 셋째 딸인 엄마는 집안의 가장 역할을 도 맡아했었다. 이 사실도 엄마의 사망 이후에나 알게 됐다. 엄마와 아빠는 외할머니를 오랫동안 모셨다. 외할머니는 우리 집 근처에 사셨는데 일찍 할아버지를 보내고, 취미생활을 하다가 사실혼 관계로 십여 년간 다른 할아버지와 사셨다. 하지만 그 할아버지도 일찍 가버리셨다. 외할머니는 공허함 때문인지, 오래된 연세 때문인지 육안으로 보기에 조금 이상해지셨다. 어느 때는 멀쩡하게 본인의 취미생활 연대기를 읊조리듯이 그땐 그랬어 라고 말하다가도 때로는 엄마는 언제 오냐며 엄마가 회사에서 오는 시간에 집착하셨다. 언제가부터 엄마의 사망 이후에는 더더욱 아빠를 불러 솔직히 말하면 뭐라 안 할 테니 말해달라며 엄마를 판 것이냐고, 도대체 어딨냐고 아빠가 자는 안방까지 쫓아와서는 고집스럽게 늘어져서 묻곤 했다. 


사실 내가 사는 이 곳은 할머니 명의의 집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내 집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너는 내가 키웠으니, 이 집은 네가 결혼해서 살 집으로 할 거야’라고 했지만 아무 증빙자료도 공증을 선 것도 아니니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집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 그저 할머니와 함께 사는게 좋았고, 커서도 당연히 나를 키워주신 분이니 모시는게 당연하다고 생각 했으니. 그 뿐이었다. 재개발 지역을 오랫동안 팔지 않아 시간이 지난 후 집값이 올랐고 브랜드 아파트로 발전하여 한 군데를 얻게 됐다. 물론 집을 얻었다고 할머니를 모신다고 그냥 들어가게 된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야 주변 지인들에게 자문을 얻게 되어 알았지만, 초기 자본금, 대출금, 대출이자 등이 들게 되기 마련이라고 한다. 


20대 때는 왜 그저 천진난만하게 할머니가 가지고 있었던 땅이니 들어가서 살기만 하면 된다고 알고 있었을까? 엄마가 집에 들인 공은 엄청났다. 대출이며, 대출이자며 오롯이 감당했던 것도 엄마였으니까. 그런데 막상 엄마가 사망하자 큰 이모부는 엄마와 함께 일했던 막내 이모에게 외할머니 명의의 아파트의 위치와 명의 여부를 물었고, 사실은 이모 또한 발톱을 드러내지 않은 채 돈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형부 지금 있는 브랜드 아파트 집 OOO집을 형부 명의로 돌리고 원래 집을 나누는 건 어때요?’ 개똥 같은 소리다. 현재 원래 아파트는 세를 준 상태고 지금 아파트보다 한참 적은 값이 나가지만 엄마, 아빠의 신혼집이며, 둘이 열심히 피땀 흘려 마련한 첫 집이다. 고로 아빠, 엄마의 목숨과도 같은 집이다. 그런데 감히 그 집에 대해서 논할 자격이 있는가? 아빠를 위하는 척, 결국에는 친척끼리 돈을 나눠갖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친척들이 미친 듯이 미웠다. 한동안은 몰래 숨죽여 울었다. 가장 노릇을 한 엄마에게 제발 알려달라고, 어떻게 해야 해답이 나올 수 있는지, 엄마 본인은 얼마나 가족들을 위해 희생했던 것인지 묻고 싶었다. 엄마 장례식 때도 안 울던 나는 엉엉 숨죽여 매일 밤을 울었다. 돈이 뭐라고. 그리고 어느 날 막내 이모는 본인의 집 근처 요양원에 할머니를 모신다는 명목으로 할머니를 데리고 갔다. 누군가가 떠나간다는 건 생각도 못했는데, 엄마가 어딨냐고 매일 물어보는 할머니가 막상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많이 아팠다. 그 빈자리를 보고 있자니 한번 더 눈물이 났다. 할머니는 그간 내가 줬던 만 원짜리 지폐며, 본인이 모았던 쌈짓돈을 끝까지 악착같이 챙겼다. 나는 막내 이모가 미웠다. 모실 거면 진작에 모시지 왜 이제야 모시냐고.


엄마는 난소에 1.5L의 물이 찬 상태에서도 할머니를 모셨다. 회사에서 분기마다 꽃놀이를 가거나 가을에는 가을 산을 가는데, 할머니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가기 전날에 취소를 하기도 했었으니까. 나는 이모가 너무나 밉고 원망스럽다. 그것보다 모든 짐들을 다 안고 있었을 엄마의 아팠던 무게감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왜 인지는 모르지만 할머니에 대한 재산권 때문인지, 뒤늦은 미안함 때문인지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신다고 하기에 엄마, 아빠가 고생한 시간과 눈물을 알기에 나는 화와 분노를 매일 밤 삭혔다. 아빠는 퇴직을 하고 삼시 세끼 할머니의 밥을 차려드렸다. 그저 밥을 차리면 되지가 아니라 이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60이 넘은 사람이 90세 넘은 어르신의 밥을 챙기다니. 그 나이면 한창 손주를 보고, 노후생활에 빠져있을 나이인데 말이다.


 집 문제 때문에 복잡해진지 두 달이 지났다. 어른들의 욕심에 뒤통수를 뻥 하고 맞은 것처럼 마음이 얼얼하다가 푹 패인 것처럼 아팠다가 분해서 울음이 난다. TV에서나 보던 상속 싸움이 이런 건가 싶으며. 힘없는 나를 원망했다가, 엄마를 미워했다가, 엄마의 마음을 안아본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이게 다라면 다행이겠지만 엄마가 짊어졌던 짐들이 세네 개는 더 있으니. 내가 사는 이 집은 내 집이 아닌 할머니 집이다. 그렇지만 엄마가 공들였던 집. 아빠와 오랜 논의 끝에 얼른 이 집을 팔고, 원래 있던 작은 집으로 가기로 이야기됐다. 나는 아빠와 엄마 나의 추억이 있는 집이 좋으니까. 할머니가 언제 괜찮아지실지 모르지만 말이다. 집 문제 관련해서는 하나씩 내 분노, 화, 슬픔을 조금씩 풀어나갈 예정이다. 빨리 예전 집으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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