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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Dec 16. 2021

내가 일을 하는 이유 (feat. 부양가족, 사대보험)

나는 30대 소녀가장이다

누군가를 부양한다는 것, 내 밑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의 명단이 생긴 다는 건 참으로 무겁다. 사실 무겁다기보다는 무섭고 생경하다. 나는 쉬는 텀 없이 바로 더 좋은 조건, 좋은 회사로 이직했다. 그리고 이미 2020년 10월부터 우리 가족들의 사대보험은 내 아래로 들어가져 있었다. 회사를 쉬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까닭이었다. 내가 쉬어 버리면 챙겨야 할 사람들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직장 내 사대보험은 내게 소중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집 같은 경우 지출을 줄일 수 있었고, 무엇보다 별도의 지역보험료를 내지 않으면서 내 직장인 건강보험을 통해 진료비, 요양비 등의 보험 급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뭐 내가 돈이 많은 프리랜서였다면 말이 달라졌겠지만. 꾸역꾸역 회사를 다니면서도 어떤 날은 그만두고 싶을 만큼 힘들었고 또 어떤 날은 그냥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흘러갔다. 내게 아무 일도 주어지지 않은 날은 '오늘 뭐했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하루가 허무하게 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빠는 성실이란 단어 두 글자로 지금까지 잘 걸어왔다고 본인 스스로 자부한다. 왕년에 회사에서 주는 공로상, 개근상을 받았다며, 늘 같은 레퍼토리로 본인을 자랑한다. 40년을 한결같이 매일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데. 맞는 말이다. 아빠의 인생은 지금껏 무엇을 바라보며,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본다. 지금 내가 겪는 중압감보다 더 크겠지.


  아빠 말고도 우리 집엔 사람으로 치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르신, 강아지 한 마리가 함께 하고 있다. 강아지는 보험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1년 멤버십 할인(10%)을 받아 약값을 충당한다. 한 달에 한번 피검사, 심장약 타기, 그것도 한 번에 비용을 내기 부담스러워 할부의 할부를 내 따져보니 한 달 기준 약 27만 원이 들어가고 있었다.


  부양해야 될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슬프다는 감정보다는 막막한 감정이 겉돌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 아빠 생각이 간절했다. 표출하지 못하는 슬픈 감정은 고이고 고여 나를 괜찮은 척하는 성숙한 어른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사실 그 괜찮은 척은 실은 괜찮지 않다는 뜻이었다.

  한 번은 베스킨라빈스 앞을 지나가며 달고 시원한 것이 나도 모르게 당기는 날이 있었다.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는데, 가게에 들어갈지 말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들어가서 3가지 맛을 골랐다. 그런데 사고 나서도 마음이 마뜩지 않았다. 왜인지 불편하고 떨떠름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이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되나. 그럴 자격이 되나. 이 아이스크림도 결국 사치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괜히 눈물이 났다. 항상 먹을 건 돈 아끼지 말고 마음껏 먹자 주의였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길게 늘어서 버렸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빤히 보며 이거 살 값이면 강아지 유산균, 간식 하나를 더 살 수 있는데, 괜히 샀네라고 읊조리며 수저로 아이스크림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궁상도 이런 궁상이 없다. 아이스크림을 빌미로 그간 쌓아놓은 슬픔을 터트리는 것인지 일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 그 울음은 조금 쉬고 싶다는 시그널일 수도 있다.


  퇴사를 하기 전 많이 고민했다. 당장의 생활비, 돈, 그래 돈이 문제였다. 앞으로 아빠와 나 각각 내야 하는 지역보험료. 그리고 강아지 약 값, 일주일은 편하게 쉬었지만 다음 일주일이 불안한 나날들로 가득할 것이라는 생각들. 아빠도 엄마도 이래서 쉬고 싶어도 쉴 수 없었을까.


  모처럼 쉬는 날 아빠와 함께 아울렛에 갔다.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그릇과 이불류들. 분명 주변에 여성 의류도 많았는데 이젠 집안 용품들이 눈에 띈다. '최라일락' 참 많이 자랐다는 새삼 느끼는 순간이다.

이제 나도 가정주부가 다 되었나 보다. 

항상 아빠 옷은 엄마가 세일할 때 한꺼번에 사주곤 했다. 이번에는 내가 아빠가 입을 만한 외투를 들어 괜히 갖다 대 본다. 이거 괜찮지 않나? 하며 말ㅇ이다. 팔 길이는 맞는지, 핏은 적당한지를 살핀다. 아빠 옷들은 어둡고 칙칙한 색들 밖에 없어 아이보리 색을 골라보았다. 아빠는 꽤 만족해하는 눈치다.


  누군가는 내게 힘들었겠다. 이제 네가 가장이네, 아빠 피붙이는 너 하나야. 네가 중심을 잘 잡아야 돼 등등 나를 가장으로 이끄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미 나는 가장인 걸 알기 때문에 조금은 쉬어가도 돼,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돼라는 그 말이 듣고 싶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바빠서 보지 못한 하늘을 퇴사를 하고서야 올려다보았다. 밤하늘 사이 보름달이 노랗게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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