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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를 나는 새 Jan 30. 2022

하루를 이겨내는 쫀득함

뉴욕 사람들은 이런 걸 먹고 하루를 또 버텨내겠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든 그곳마다의 "간단한" 소울푸드가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길거리 붕어빵이나 호떡, 떡볶이, 어묵쯤이랄까. 길에서 먹거나 테이크아웃할 수 있도록 간편하고,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씹히는 느낌이 좋거나, 달달하거나, 혹은 아주 매콤해서, 먹는 동안만이라도 하루의 스트레스와 고단함을 잊을 수 있는 음식들. 그리고 적당히 배가 불러 바쁜 일상에서 끼니를 때우기 제격인 것들이다. 아마도 방콕 야시장에서 서서 먹은 팟타이와 쏨땀, 바나나 팬케익이 그런 음식일 테다. 물론 늦은 저녁 시간, 타이베이 번화가 한복판에서 선채로 들고 먹던 고소하고 달큼한 곱창 국수의 맛도 잊을 수가 없다. 


내 생각에 뉴욕에서 이런 지위에 있는 음식이라면 아마도 베이글이 아닐까 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베이글 샌드위치'라고 해야 할까. 에이, 뭐 도넛도 있고, 피자도 있지 않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그 지역이 가장 원조이고 제일 잘하고, 다른 곳에서 흉내 내어 만들어도 절대 못 따라갈 것 같은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베이글이 단연 원픽이라는데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그 차별화된 맛이 심지어 뉴욕 수돗물 때문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니. 


원래 베이글은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에 살던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17세기에 처음 만들어먹기 시작했던 것인데, 이들이 19세기 북미지역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함께 가져와 퍼트린 것이라고 한다. 뉴욕이 베이글의 중심지가 된 건 이 동유럽계 유대인들이 주로 정착한 곳이 미국 동부, 그중에서도 뉴욕이라서다. 베이글은 물과 밀가루, 이스트, 그리고 소금으로만 만든다. 그래서 버터나 설탕이 잔뜩 들어간 대부분의 다른 빵들에 비해 무척 건강한 편이다. 밥이 주식인 한국 사람들에겐 생소한 정보겠지만, 북미 지역에선 장염에 걸렸을 때 빠른 회복을 위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토스트를 꼽기도 한다. 특히 베이글 빵 토스트는 버터나 설탕이 포함되지 않아 아픈 속을 더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충실한 에너지원이 되어줄 수 있다. 그 동네에 여행이나 출장을 갔다가 갑자기 장염이 생겼는데 죽을 파는 곳도 없고 뭘 먹을지 막막하다면 추천할 수 있는 방법이겠다. (눈치챘겠지만 나 역시 이런 일에 유경험자다.)


베이글의 쫀득한 맛은 밀가루 반죽을 굽기 전에 물에 데쳐 빵 속의 기공이 치밀해지기 때문이란다. 다른 나라에서 대량 생산하는 베이글에선 이런 쫀득함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물에 데치지 않고 그냥 바로 구워버려서라고. 그 외에도 다른 나라의 베이글은 데치는 물에 설탕을 넣거나, 반죽에 버터를 넣거나, 가운데 구멍 크기가 확연하게 크거나 등등, 뉴욕 베이글과는 차이가 있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러니까 담백하고 쫄깃한 베이글의 원형을 먹어보고 싶으면 뉴욕에 가보는 게 당연하다.


명성이 이리도 자자하니 뉴욕에 있는 동안 몇 끼니는 꼭 베이글로 해결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가기 전부터 뉴욕 베이글 맛집을 다 검색해선 구글 맵 위에 저장해놓았다. 뉴욕 3대 베이글이라고 하면 보통 Ess-a-BagleMurray's Bagle 까지는 공통으로 꼽고 나머지 하나는 출처마다 차이가 있는 편인데, 나는 Brooklyn Bagle & Coffee를 저장해두었다. 이들 중 내가 가장 자주 간 곳, 애정 하는 곳은 Ess-a-Bagle이다. 신기하게도 내가 머물던 Airbnb 호스트 집에서 불과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매장이 있었다. 일부러 베이글 집 가까운 곳을 찾아다닌 것도 아닌데 숙소를 잡고 보니 그 근처였달까. 이런 기분 좋은 우연 덕분에, 지내면서 이른 아침이든 늦은 시간이든 베이글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뉴욕의 여러 베이글 집들이 다 맛있었지만 그래도 이곳이 내 마음속 1등인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빵의 크기가 크고 아주아주 쫀득해서다. 그리고 크림치즈를 아끼지 않고 꽉꽉 눌러 푹신하게 발라줘서다. 게다 먹어보면 아마도 이 크림치즈 속에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건가 싶을 것이다. 한 입씩 먹을 때마다, "아... 다 괜찮아. 일단 이거 먹으면 다 괜찮아..."란 생각마저 들게 하니까. 


샌드위치 필링으론 어떤 것을 선택해도 좋겠지만, 전통적으로 실패 없이 가고 싶다면 단연 연어를 추천한다. 이미 크림치즈만으로도 고소한데 여기에 연어까지 더하면, 하루 필요한 고소함을 단번에 200% 이상 채울 수 있다. 아, 빵은 취향껏 에브리띵(이것저것 다 들어 있는)이나 통밀빵으로 골라보자. 



이렇게 주문해보니 '쫀득한' 빵 사이에 역시나 '쫀득한' 크림치즈가 두껍게 발려있고, 그 안에 연어가 촉촉하게 꽉 들어차 있다. 양파와 토마토도 튼실하다. 한 입 베어 무니 고소하고 달큼하고 탱글탱글한 식감이 온몸의 감각을 깨워준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맛있는 베이글을 먹고 있구나'라는 현존감이 확실하게 느껴진달까. 여기에 커피까지 곁들이면 비로소 오늘을 제대로 살아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등을 토닥이며 오늘도 힘내라고 말하는 것처럼. 베이글 샌드위치가 뉴욕의 '간편 소울푸드'라는 나의 범주화는 아마도 그래서 틀리지 않았을 것같다.




매장은 꽤 널찍하고 wifi도 잘되어서 이른 아침에 베이글을 먹으며 업무를 보기에도 좋다. 꽤 오래 앉아있어 봤지만 눈치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친근한 것으로 치자면, 마치 한국의 김밥천국을 카페로 리노베이션 한 느낌이랄까. 나는 아침에 들러 절반은 매장에서 노트북 자판을 투닥거리며 먹고, 나머지 반은 포장해서 나중에 점심으로 먹곤 했다. 내용물이 정말 튼실하기 때문에, 다이어트 중이라거나 여자라면 한 번에 먹기 꽤 많게 느껴질 것이다.



매대에 수북이 쌓여있는 베이글 빵과 크림치즈를 직접 보며 내 직관을 따라 골라보는 재미도 무시할 수 없다.특히 이 크림치즈들은 빵에 올라가기 전부터 눈으로만 봐도 이미 쫀득해 보인다. 다양한 속재료들 덕분에 색상도 갖가지다. 은은한 파스텔톤이라 무슨 색상인지 color picker로 찍어보고 싶을 정도로 예뻐서 눈도 즐겁다. 내가 지금 뉴욕에 거주 중이라면 이 집 베이글을 빵과 크림치즈 필링 종류별로 다 조합해서 먹어볼 텐데. 


그러니까 나는 베이글에 진심이다. 지금 뉴욕에 사시는 분들, 정말 부럽다. 






물론 Ess-a-Bagle 외에도 앞서 말한 유명 베이글 집을 다 다녀보았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끄적여본다.



Murray's Bagle

500 6th Ave, New York, NY 10011, United States


파슨스 디자인 스쿨 근처의 West Village에 있다. Redeemer's Church (*)가 가까워 거기 예배에 참석한다면 들르기 좋은 곳이다. 클래식한 검은 차양에 약간 작은 글씨로 상호가 쓰여있기 때문에 눈 크게 뜨고 잘 찾아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Redeemer's Church는 지금은 은퇴하신 Tim Keller라는 매우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던 곳이라 한국에도 아는 사람들이 꽤 있을 듯하다.) 


매장 안은 우드&블랙으로, 벽에 걸려있는 팝아트스러운 메탈 플레이트 장식들이 친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베이글 외에도 갖가지 음료수와 간식들을 같이 구매할 수 있어, 일용할 양식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곳으로써의 기능에도 꽤 충실하려 하는 곳이다. 왕래가 많은 곳에 위치해서인지, 짧은 시간 동안에도 가게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오래된 터줏대감 같은 매장이라 그런지 동네 사랑방 느낌도 좀 난다. 혼자 또는 동행 한 명 정도 같이 가서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기에 매우 적당한, 정겨운 느낌의 베이글 집이다. 좌석이 아주 많지는 않아 오래 앉아 있긴 겸연쩍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왠지 말 안해도 알아서 해야 할 것만 같은 한국인의 눈치를 좀 접는다고 해서 아무도 직접 뭐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 물론 커피도 꽤 괜찮은 편이다. 






Brooklyn Bagle & Coffee Company

286 8th Ave, New York, NY 10001, United States


맨해튼과 브루클린에 걸쳐 5개 매장이 있는데, 나는 맨해튼에 있는 2개 매장 중 8th Ave. 에 있는 곳에 들렀었다. 특이하게도 이 집은 다른 베이글 가게들과는 달리 "Coffee"가 상호에 추가되어 있다. 그렇다. 상호에도 넣을 만큼 자기들은 커피에도 자신 있다는 거다. 그래서 나도 기대하면서 라테를 같이 주문했다.



이 브랜드는 샌드위치에 발라먹을 크림치즈의 종류가 무척 다양한 것도 특징이다. 정말 무슨 크림치즈들이 슈퍼마켓에 진열된 고기처럼 2열 횡대로 쫙 늘어서 있는데, 다 맛있어 보이니 그게 문제다. 하지만 그렇게 선택 장애를 겪는 중이더라도 혹 내가 계산대 줄 서는 방향이 잘못되진 않았는지 꼭 확인해보자. 안 그러면 뉴요커 한 명이 다가와 갑자기 당신 등을 툭툭 칠 수 있다. "이봐, 줄 서는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내가 얼마나 많이 기다렸는데 네가 감히 나보다 빨리 주문하려고 하니?) 본인도 얼른 베이글이랑 커피랑 챙겨서 일하러 가야 되는데 방해하지 말라는 거겠지. 제법 미국의 여러 지역들을 다녀보았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는데, 과연 차가운 도시의 바쁜 뉴요커들 답다. 물론 이런 것들조차도 이 도시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껴볼 기회니까.






Ess-a-Bagle

324 1st Ave., New York, NY 10009, United States


Murray's Bagle

500 6th Ave, New York, NY 10011, United States


Brooklyn Bagle & Coffee Company

286 8th Ave, New York, NY 10001,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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