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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식혜를 찾아서

추억의 맛을 찾는 실험 (1)

by 정벼리

더워도 너무 덥다. 이른 아침 잠시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는 것과 오밤중에 강아지 산책을 시키는 것 말고, 그러니까 해가 떠있는 동안에는 바깥세상과 단절된 주말을 보냈다. 한낮 온도가 37도를 넘어간다니 나갈 엄두가 안 났다. 하지만 집안에서 긴긴 시간 공들여 할 일이 있어서 답답하지는 않았다.


지난 주중 어느 날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이번 주말에는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충동적으로 인터넷 쇼핑몰에서 엿기름과 삼베주머니를 주문했다. 옛날 옛적부터 장바구니에만 담아두고 차마 주문 버튼을 누르지 못한 항목이었다. 이번 주말 나는 인생음료를 내 손으로 만들어볼 참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음료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식혜라고 소리친다. 비x, 잔치x, 느x, 자연주x, 한x… 시중에 나온 갖가지 식혜는 대부분 먹어보았고, 떡집이나 시장에서 페트병에 담아 얼린 식혜를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번 여름에는 회사 앞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보다 금년 신제품이었던 살얼음 식혜를 많이 주문한 것도 같고.


어려서부터 식혜를 워낙 좋아해서, 한 번씩 할머니에게 식혜를 만들어달라고 조르고는 했다. 할머니 손에서 나온 진하고 깊은 그 단맛을 무엇에 견줄 수 있을까. 성인이 된 후 어디서 어떤 식혜를 사 먹어도 그때 그 맛은 안 난다. 식혜 향은 풍겨도 할머니가 만들어준 것 특유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실컷 맛있게 완병을 때리고도, 에이 어릴 때 그 맛은 아니다, 중얼거리는 나를 보고 남편은 가끔 말했다.


“잘만 들이켜 놓고는. 그렇게 그 맛이 그리우면 직접 만들어보지 그래?”


어휴,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게 얼마나 어렵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인데. 오죽하면 내 말이라면 당장 팥으로 메주를 띄워보자며 광에서 팥주머니부터 내올 할머니가, 식혜만큼은 조르고 졸라야 겨우 한 번씩 오만 생색은 다 내면서 만들어 주었다.


엿기름을 박박 문지르면서 박자 맞춰 팔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는 랩을 삼절까지 쏟아내고, 명절 때나 쓰는 대형 전기밥솥을 꺼내 앉히며 밥솥을 몇 개를 끄집어내냐 투덜거리고. 발효가 끝난 단물을 들통에 팔팔 끓이며 손주 입맛 한번 맞춰주느라 한 여름에 별짓을 다 헌다고, 다 만들어진 식혜를 한소끔 식혀 담아 냉장고에 쌓으면서 온 집안 그릇이란 그릇은 다 꺼내부럿네, 탄식까지 마쳐야 할머니의 기나긴 생색은 끝이 났다. 그래놓고는 대접 한가득 콸콸 식혜를 따라주고, 그릇 바닥에 붙은 밥알 한 톨 마저 날름 핥아먹는 나를 애정만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야, 한 잔 더 마실 끼냐?”




할머니는 지금으로부터 8년 전에, 10여 년의 긴 와병 끝에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병석에 누운 날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할머니의 식혜를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할머니와 손 붙잡고 시장 방앗간에서 엿기름을 사들고 걷는 일이나, 현관 처마 밑에서 삼베 주머니를 박박 문지르는 할머니 발치에 앉아 재잘재잘 떠드는 일이나, 채 식지도 않은 뜨거운 식혜를 한 숟가락만 맛보게 해달라고 종종거리며 싱크대 옆을 서성이는 일 따위는 저 멀리 추억 속으로 사라진 옛일이 되어버렸다는 진실은 할머니가 쓰러진 그날에 이미 내 심장 깊은 곳에 운석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래서였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나는 한 번도 할머니에게 옛날에 만들어주던 식혜가 먹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 식혜는 어떻게 만들었기에 그리 맛있었던 것인지도 묻지 않았다. 다시 올 수 없는 날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요즘은 어떤지, 지금은 어디가 불편한지만 끝없이 물었고, 다음에 또 올게, 그땐 무얼 사 올게 하는 그런 시답잖은 소리만 늘어놓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 그 맛의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모른 채 찾아 헤멜 것을 알았더라면, 눈 딱 감고 한번 물어나 볼 것을. 이제 그 맛의 비결을 답해줄 이는 곁에 없고, 나는 내 손으로 다시 인생식혜를 재현하려 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지금 나는 매우 진지하고 비장하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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