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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혜에 대한 진지한 탐구과정

추억의 맛을 찾는 실험 (2)

by 정벼리

* 이 글은 앞 이야기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인생 식혜를 찾아서 / 추억의 맛을 찾는 실험 (1)


할머니의 식혜. 다시는 맛볼 수 없는 그리움이고, 그 맛을 떠올리면 어쩐지 잠깐 방에 혼자 들어가 훌쩍훌쩍 청승을 떨고 싶어지는 나의 인생 식혜. 나는 이번 주말 그 추억의 맛을 찾는 실험을 단행했다.


할머니가 만든 식혜의 묵직한 단맛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터넷에서 전통식혜 레시피를 십여 가지 찾아가며 어린 시절 내 기억과 비교대조 했다. 비록 나는 뼛속까지 문과이지만 학창 시절 과학시간을 떠올려보며, 이 실험을 위해 가설이라는 것을 몇 개 세워보았다.



가설 1. 묵직한 단 맛은 엿기름 앙금을 거르지 않는데서 나온다.

(인터넷 레시피 상당수는 수십 분 ~ 수 시간 앙금을 가라앉혀 분리 후 식혜의 맑은 색을 냈다. 그러나 우리 할머니의 식혜는 늘 탁한 회백색이었다.)


가설 2. 묵직한 단 맛은 비율 따위 가볍게 무시한 엄청난 밥알 수에서 나온다.

(식혜 밥알을 밥숟가락으로 푹 퍼먹는 것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할머니는 항상 고두밥을 그득그득 지어 밥알이 잔뜩 들어간 식혜를 만들어주었다.)


가설 3. 묵직한 단 맛은 왕창 때려 넣은 백설탕에서 나온다.

(그 옛날 알룰로스나 스테비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할머니는 설탕을 아껴 넣었을 리가 없다.)



가설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맛의 비결을 찾아내기 위한 실험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1. 엿기름 500g을 삼베주머니 절반씩 나누어 담아 꽁꽁 묶는다.

2. 밥솥에 고두밥을 한가득 짓는다.

3. 밥을 짓는 동안, 커다란 볼 두 개에 각각 2.5리터의 물을 넣고 딸아이와 내가 엿기름 주머니 하나씩 맡아 박박 문질러 아주 진한 엿기름물을 만든다. (아이가 어느 정도 박박인지 묻는다면, 옛날 엄마 할머니는 팔목이 떨어져 나갈 정도라고 표현했으니 아주 신나게 쥐어짜대라고 답한다.)

4. 만들어진 엿기름 물을 또 다른 볼에 조금씩 나누어 담아 약 1.7리터짜리 세 개로 소분하고, 각 A~C로 이름을 붙여준다.

5. A~C의 조건은 각각 다음과 같이 세팅한다.

A : 앙금 거르지 않고 고두밥 적당량 → 밥솥 보온모드

B : 앙금을 조금만 거르고 고두밥 잔뜩 → 광파오븐 발효모드

C : 앙금을 많이 거르고 고두밥 적당량 → 제빵기 발효모드

6. A~C가 각각 밥알이 10개 이상 떠오를 정도로 발효가 되면 다음과 같이 첨가물을 넣어 각각 15분 정도 팔팔 끓인다.

A : 설탕 1큰술 + 가루 알룰로스 2큰술 + 생강진액 2큰술

B : 설탕 1큰술 + 가루 알룰로스 2큰술 + 생강진액 2큰술

C : 설탕 3큰술 + 생강진액 2큰술

7. A~C를 충분히 식힌 후 냉장고에 넣고, 다음 날 먹어보아 묵직한 맛의 비결을 찾아낸다.



토요일 정오부터 시작한 식혜 만들기는 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에어컨을 팡팡 틀고도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지난한 조리과정이었다. 실험과정 4단계가 채 오기 전에 아이는 힘들다며 이미 부엌에서 도망쳐버려, 고독하게 혼자 뚜벅뚜벅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밥솥과 광파오븐, 제빵기는 각각 온도가 달랐는지 발효될 때까지 시간차가 있어 큰 냄비에 팔팔 끓이는 과정도 시간차를 두고 계속되었다.


할머니의 10절을 넘어가는 생색 타령이 절로 이해가 갔다. 에어컨도 없던 시절 삼복더위에 매년 할머니 고쟁이를 붙잡고 식혜, 식혜 노래를 불러댔다니, 하여튼 철딱서니 없는 것 같으니라고. 어린 시절 나에게 뒤늦은 핀잔을 주어가며 식혜 여섯 병을 만들어냈다. 할머니 말마따나 집에 병이란 병은 죄 끄집어냈다.




실험은 실패했다. 나는 맛의 비결을 끝내 식별해내지 못했다. 서로 다른 종류의 세 가지 식혜 모두 비슷비슷하게 집에서 만든 식혜다운 투박한 맛을 뽐내긴 했지만, 아, 이 맛이다,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이 원인이었을까.


통생강을 조각내 풍덩 담그지 않고 생강진액으로 대체해서 그럴까. 우리 집엔 명절날 꺼내 쓰는 대형 밥솥이 없어서 제빵기와 광파오븐으로 대체해서 그럴까. 아니면 그래도 건강을 챙겨보겠다고 대체당을 첨가해서 그럴까. 그렇지만 백설탕으로 왕창 때려 넣은 병에서도 원하는 맛은 나지 않았는데, 혹시 앙금과 설탕과 대량의 고두밥이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했던 걸까.


아무래도 이 실험은 앞으로 몇 년간 주기적으로 여러 변인들을 이리저리 통제하며 쭉 계속될 것 같다. 그 끝에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나도 그 옛날 할머니처럼 내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한 잔 더 마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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