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덧없이 시들 줄 알고 있었지만.
싱크대 앞에 서서 유리병에 꽂혀있던 장미 줄기들을 조심스레 왼손으로 싹 움켜쥐어 꺼내 올린다. 그대로 쥔 채 오른손으로 병을 들어 물을 따라내고 새 물을 찰랑 담는다. 새 물이 담긴 유리병을 내려놓고 전지가위를 들어, 왼손에 쥐고 있던 장미다발의 가지 끝을 사선으로 또각또각 잘라낸다.
어제까지만 해도 병에서 꺼낸 장미 가지들을 살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가지 하나씩을 들어 상한 끝을 잘라내고 시들한 겉꽃잎도 뜯어낸 뒤 새로 예쁘게 둘러 꽂았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다. 하루 사이에 싱싱함이 폭싹 내려앉았다. 잘못 건드리면 꽃잎이 활짝 핀 머리채 그대로 깔딱 고개를 숙여버릴 것만 같았다. 가지 끝을 잘라낸 대로 키가 들쭉날쭉해졌더라도 그냥 그러쥔 모양 그대로 유리병 입구에 꽂아 넣었다. 내일까지는 어여쁨을 유지해 주려나 모르겠다.
꽃다발을 한 아름 집에 들인 것은 고작 지난 화요일 오후였다. 스프레이형 장미라 줄기는 10대라고 해도, 꽃봉오리는 수십 개가 수줍게 맺힌 아주 풍성한 장미다발이었다. 아파트 후문 앞 꽃집 유리창 너머로 색색의 현람함이 나를 유혹해 온 것은 이 여름 내내 반복된 일상이었다. 매일 눈길을 주다가도 여름엔 안 된다며 참아왔는데, 그날은 아주 씩씩하게 꽃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아이가 방학이라 내내 집에 있으니 꽃이라도 좀 꽂아둘까 해서요."
"아이가 좋아할 만한 꽃이라면, 이건 어떠세요?"
사장님은 꽃망울이 작은 장미를 추천했다. 한 대에 꽃봉오리가 서너 개씩 달려 몇 대만 사가도 풍성하니 예쁠 거라고 했다. 게다가 꽃잎 하나하나 레이스처럼 겹겹이 피어나는데, 너무 크기 않은 꽃송이라 더 사랑스럽다고도 했다. 가만 보니 꽃봉오리가 자분자분 귀여운 게 우리 아이랑 꼭 어울리는 것 같았다.
꽃집을 나설 때부터 알고는 있었다. 이렇게 날이 더워서야 오래가지는 못할 거라고 말이다. 한여름엔 어떤 꽃을 사 오더라도 긴 시간 싱그러움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했다.
꽃 냉장고에서 꺼내져 우리 집에 들어설 때까지 뙤약볕에 놀랐을까 봐, 집에 들어서자마자 꽃병에 얼음물부터 채워 넣었다. 같이 사온 플라워푸드도 넣어주고, 물관이 조금이라도 덜 손상되라고 가지를 물에 담근 채 꽃을 손질했다. 부케형으로 풍성하게 꽃꽂이한 꽃병을 가장 직사광선이 덜 드는 부엌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맘 같아서는 거실 테이블에 화사하게 올려두고 싶었지만, 대낮에 거실 창에서 쏟아질 햇볕에 곧장 시들어버릴까 싶어 그러지 않았다. 그 뒤로도 매일 얼음물과 플라워푸드를 대령하고 가지 끝을 잘라주며 정성을 들였건만, 고작 일주일 만에 이렇게 시들해질 것이 뭐람. 이럴 줄 알았어도, 야속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하긴 야속한 게 어디 꽃뿐일까. 웬 꽃이냐는 물음에, 네가 방학을 맞은 기념으로 사 왔다고 답하자 아이는 꺄아 탄성을 질렀지만 그때뿐이었다. 하루라도 더 예쁘게 피어있길 바라며 동동거리는 것은 죄 내 몫이었지, 아이는 꽃이 시들건 말건 별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이가 거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여름 낮을 보내는 동안 장미 다발은 뎅그러니 식탁 가운데서 홀로 시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어쩌겠나. 아이가 사달라 졸랐던 것도 아니고, 내 욕심에 들인 꽃인걸.
결국 이럴 걸, 나 혼자 맘 졸이다 금세 시들어버릴걸 내 진작에 알고 있었지. 한여름의 장미 한 다발, 덧없지만 잠시간의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