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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정말 잘 자라 주었어

만세 선인장 이야기

by 정벼리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몇 년에 한 번씩 '일태기'라고 불리는 난관에 부딪히고는 한다. 에너지를 모두 잃어버린 듯 힘이 쪽 빠지는 시기는, 원치 않아도 한 번씩 꼭 찾아오는 것 같다. (나만 그런지도 모르지만.) 그런 시기이면 나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낮 시간의 일에 대하여 조개처럼 입을 다문다. 사무실에서 있었던 어떤 이야기도 다시 떠올리기 싫은 것처럼 그냥 말조차 꺼내고 싶지 않아 진다. 남편은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이라, 가끔 찾아오는 나의 일태기를 귀신 같이 알아차린다.


몇 해 전에도 일태기를 겪으며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었던 나에게, 남편은 어느 날 저녁 작은 선물을 하나 건넸다. 가로세로 5센티도 되지 않을 만큼 작은 하얀 화분에 심긴 엄지손가락만한 선인장이었다. 째깐한 몸체에는 양쪽으로 동글동글한 곁가지 순이 대칭으로 달려 있어서 꼭 팔 벌린 사람 모양 같았다. 조그마한 밀짚모자도 하나 쓰고 있었다. 남편은 로드킬 선인장이라며, 이름이 웃겨서 사 왔다고 했다. 같이 웃자는 나름의 위로였겠지만,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로드킬을 건네다니. 아주 잠깐이지만 살짝 부아가 치밀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선인장은 귀여우니까 죄가 없지. 다음 날 출근길에 조심조심 가져와, 내 자리 뒤편으로 햇빛이 잘 비치는 창가 선반에 올려두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영어로는 로드킬(Road Kill Catus)이라고 불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만세 선인장이라는 귀여운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고 했다. 과연 이름이 중요하다고, 만세라는 이름을 알고 나니 로드킬일 때보다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만세 선인장은 한동안 창틀 위에서 잘 자라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본체도 곁순도 (쑥쑥 까지는 아니고) 쏙쏙 커갔다. 오른쪽 팔 아래쪽에서는 새순도 났다.


길쭉 자라 한 컷에 담기 어려운 만세 선인장

그렇게 잘 자라던 만세 선인장은 어느 날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아침마다 사무실을 청소해 주시던 여사님께서 실수로 화분을 건드린 것이다. 한 순간에 화분은 바닥에 떨어져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오른팔이 똑 떨어져버렸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여사님께 이참에 분갈이를 해주면 되겠다고 말하며 웃어넘겼지만, 사실 속은 쓰렸다. 명색이 만세 선인장인데, 양팔 중에 한 팔이 떨어져 버리다니. 더 이상 만세 모양이 아니었다. 팔 한쪽이 떨어져 나간 채 바닥에 널브러진 선인장은 누가 봐도 만세보다는 로드킬이라는 이름이 훨씬 어울렸다.


아픈 마음을 뒤로하고, 조심조심 선인장을 주워 신문지에 둘둘 감싸두고, 깨진 화분과 흙을 모아 버렸다. 그날 점심시간엔 근처 다이소를 찾아 급한대로 2리터 상토 한 봉지를 사왔다. 사무실 구석에 굴러다니던 빈 화분에 선인장을 옮겨 심었다. 떨어져 나간 팔도 다른 화분에 흙을 채워 꽂아두었다. 잘 자라겠거니 하고 나란히 선반에 올려두었다.


그 뒤로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선인장이 자리했던 화분이 녀석에게 너무 작았던 모양이다. 큼지막한 새 화분에 심긴 이후로 하루가 다르게 몸통이 두꺼워지고 키도 쑥쑥 자라났다. 자라나는 모양새가 워낙에 기특해서, 한 달에 한 번씩 얼마나 컸는지 키라도 재줘야 할 것 같았다.


그 뒤로 누군가 사무실을 찾아, 우와 선인장 화분도 있네요,라고 감탄하면 나는 주책맞게 녀석의 스토리를 읊곤 했다. 이게 말이죠, 원래는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아이였는데 그 아이가...




그리고 얼마 전, 만세 선인장 본체의 생장점이 이제는 노화한 듯, 서서히 회색으로 말라버렸다. 본체의 키는 이제 더 자라지 않을 작정인가 보다. 이만하면 기특할만큼 정말 잘 자라주었다. 그래도 아직 곁가지는 튼실하게 성장을 계속하고 있어, 한 때 왼팔을 담당했던 가지는 또 다른 몸통이 되어 저만의 양팔을 펼쳐냈다. 그리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던 새순도 착실히 몸을 불려, 떨어져 나간 오른팔을 어엿하게 대신하고 있다.


로드킬이 아니었다. 다시 만세 선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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