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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보다는 도라지가 좋단 말이야

여인초 이야기

by 정벼리

내가 다니는 요가원에는 창가에 큼직한 화분이 몇 개 놓여 있다. 맨 뒤 쪽에는 중품에서 대품으로 커가는 여인초가 자리하고 있는데, 나는 그 옆에 앉아 수련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자리에 앉아 요가를 하기 위해 남들보다 일찍 수련실에 도착할 정도다.


초록초록한 시야를 즐기며 요가를 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워낙에 몸을 잘 쓰지 못하는 만년 초급 회원이라 내 눈은 수련시간 내내 선생님의 동작을 따라가기 바쁘지, 곁의 초록잎을 느낄 여유 따위는 없다. 다만 수련의 마무리 단계인 사바아사나 시간이 되어서야 아무도 몰래 슬쩍 실눈을 뜨고 휘영청 늘어진 여인초를 슬며시 올려다보곤 한다. 어둑한 조명 아래 온몸을 늘어뜨리고 누워 여인초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 시간이 퍽 좋다.


어쩌면 아직 내 손으로 키워보지 못한 식물에 대한 일종의 미련일지도 모르고.


자꾸만 실눈 뜨고 훔쳐보게 되는 여인초




한참 대형카페가 처음 생겨나던 시절 즈음, 동생과 식물원 컨셉의 카페를 찾았다. 주로 열대지방에서 온 커다란 잎을 가진 식물들이 커다란 건물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졸졸 흐르는 물길까지 만들어두어 꽤나 이색적인 느낌의 공간이었다. 나는 길쭉 뻗은 줄기 끝에 바나나잎처럼 넓죽한 잎이 쳐지듯 펼쳐져 파라솔마냥 그늘을 드리우는 한 열대식물에 자꾸만 눈길을 빼앗겼다.


실내에서 자랐음에도 키가 족히 3미터는 되어 보였다. 나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이리저리 뜯어봐도 엄연히 풀인데,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송두리째 압도하는 거대함이 있었다. 눈길을 빼앗기다 보니 점차 마음도 빼앗겨서, 카페를 나설 때에는 나는 그 거대한 풀의 이름을 기어이 알아내버리고 말았다. 여인초(旅人焦).


여인초의 이름은 여자를 의미하는 여인(女人)으로 쉽게 오해되고는 한다. 쭉 뻗은 줄기와 낭창하게 휘어지는 잎의 생김이 우아한 여인의 형상을 닮아 붙은 이름이라는 꽤나 그럴듯한 설명까지 덧붙여지기도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여인초의 이름은 여인(女人)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인초의 여인(旅人)은 여행자를 뜻한다. 이름 그대로를 풀어 여행자의 나무라고 불리기도 한다. 넓은 이파리 그늘 아래에서 여행자들이 햇빛을 피하거나 잎에 고인 물로 목을 축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만 들어서는 아무렴 햇빛이 아무리 따가워도 나무그늘을 찾아 쉴 일이지 무슨 풀잎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나 싶겠지만, 정말 크게 자란 여인초를 본다면 충분히 더위를 피할만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다 큰 여인초는 그 높이가 10~25m에 이르고, 잎 또한 3~4m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한 개체에 20~30장의 잎이 부채꼴로 달렸으니 이 정도면 여행자에게 잠시간 휴식처가 되어주기 충분하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고 어느 해 내 생일날, 동생은 선물로 화분을 하나 보내겠다며 원하는 식물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동생에게 이야기했다. 우리 예전에 함께 갔던 그 카페에서 우리 테이블 위에 그늘을 드리우던 그 아이 기억하냐고, 그 아이를 키워보고 싶다고. 그날 오후 하얀 화분에 심긴 화초가 집에 배달되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볕 좋은 창가에서 무럭무럭 키를 키워도, 부채꼴 모양으로 솟은 이파리가 예닐곱 장을 넘어가도, 우리 집 화초 잎은 여유롭게 축 쳐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내준 화분은 잘 크고 있어?"


전화통화를 하던 중 동생이 물었다. 나는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어. 잘 크고 있어. 근데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이상하게 우리 집 여인초는 꼿꼿하게 뻗은 모양새로 24시간, 365일 긴장을 풀지 않는다.“
"엇, 언니! 그거 여인초 아니야. 극락조야."
"극락조?"
"응. 화분 주문할 때 화원에서 극락조랑 여인초가 비슷한데, 여인초는 크게 키우다 보면 가정집에 두기엔 과하게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비슷한 아이로 극락조를 추천해 줬어. 축축 늘어지지 않고 깔끔할 거라고 해서 극락조로 보냈지."
"뭐? 나는 그 축축 늘어지는 잎을 갖고 싶었단 말이야! 무효야!"
"뭐가 무효야! 극락조가 여인초보다 훨씬 비쌌거든! 꽃도 극락조가 훨씬 화려해. 화원에서 여인초가 도라지라면, 극락조는 인삼이라고 했다고."


나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삼이고 나발이고, 열대식물이 아파트 실내에서 꽃을 피울 리가 있나. 아이고, 내 자잘한 풀떼기들 위로 늘어지는 여인초 잎을 얹어보려던 원대한 계획은 다 텄구나.


이러한 연유로 나는 아직까지 여인초를 직접 키워보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일주일에 몇 번씩 가까이에 앉아 눈으로만 훔쳐보며, 여인초를 향한 들끓는 소유욕을 다스리는 것이다. 나중에, 언젠가는 꼭 너를 갖고 말리라. 도라지면 어때. 내가 인삼보다는 도라지가 좋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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