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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멘트 사이 피어난 원시식물

보스턴고사리 이야기

by 정벼리

뼛속부터 도시 소녀인 나는 고사리를 식탁 위에 올라온 나물로만 만났다. 한반도에서 봄이면 지천에 새순을 올리니 봄나물의 대명사가 되었을 테지만, 말리거나 찌기 전의 고사리는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살아있는 고사리를 성인이 된 후 영국에서 처음 보았다.


대학에 들어간 스무 살 여름, 친구와 유럽여행을 떠났다. 친구의 삼촌이 마침 영국에 거주하고 계셔서, 영국에서 며칠간은 그 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정확한 지명은 잊어버렸지만 삼촌 댁은 런던 근교의 베드타운 같은 소도시에 있었다. 그 집에 묵으며 지역 주민들이 출퇴근 시 이용하는 기차를 타고 런던 중심 관광지를 오가곤 했다. 삼촌 댁은 가난한 배낭여행자들에게 주어진 잠시간의 안식처였다.


그때만 해도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되어 있지도 않았고, 스마트폰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여행 정보를 가이드북에서 얻던 때였다. 몸소 겪는 현지 상황은 많은 것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특히 현지 물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예산을 짰기 때문에 늘 돈이 쪼들렸다. 예나 지금이나 유럽은 시장 물가는 저렴해도 외식비용은 상당해서, 식비가 예상보다 곱절로 들어갔다. 게다가 한국을 떠나 우선 이탈리아를 한 바퀴 돌고, 프랑스 남부에서부터 파리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온 참인데, 공교롭게도 여행이 진행될수록 점점 물가가 비싸져서 곤혹스러웠다. 그런데 가장 물가가 비싼 런던에서 친구의 삼촌과 숙모가 그 어떤 숙소보다 깨끗한 방을 내어주고, 아침저녁으로 푸짐한 식사까지 차려주시니 몸과 마음이 절로 노곤노곤 내려앉았다.


삼촌 내외는 어수룩한 젊은이들이 안전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이것저것 신경을 써주었다. 그리고 주말에는 시간을 비워 대중교통으로 방문하기 어려운 지역을 함께 돌아주셨는데, 그중 한 곳이 리치먼드 공원(Richmond Park)이었다. 리치먼드 공원은 약 2,360 헥타르의 넓이로, 런던 내 왕립공원 중 가장 큰 곳이라고 한다. 17세기 왕의 사냥터로 조성된 이곳에는 여전히 야생 사슴이 다수 서식하고, 고목이 빽빽한 숲과 초원, 습지가 고루 자리하고 있다.


숲길을 걷는데 양 옆으로 커다란 관목 같기도 하고, 그냥 덩치가 산만한 풀 같기도 한 둥그런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저 식물은 원시시대에 초식공룡이 뜯어먹을 것처럼 생겼어요.”
"저게 뭔지 모르니?"
"네. 처음 보는 식물이에요."
"저거 고사리야."
"뭐라고요? 저게 고사리라고요?"
"어떻게 고사리가 저렇게 크죠?"
"이곳 사람들은 고사리를 먹지 않아서, 고사리가 저렇게 거대하게 자라는 게 일반적이야. 그래도 봄이면 한국사람들이 고사리순을 많이 캐가고는 해."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밥반찬으로 먹어오던 고사리가 이렇게나 크게 자랄 수 있는 식물이었다니.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실로 고사리는 알고 보면 단순한 밥도둑 나물 그 이상이다. 고사리는 고사리 속에 속한 양치류를 통틀어 이르는 이름으로, 식물학계에서는 고사리를 살아있는 화석이라 부른다. 고사리는 약 3억 6천만 년 전 데본기 말기에 처음 등장하여, 공룡이 살기 전부터 이미 지구상에 널리 번성한 생물이었다. 리치먼드 공원에서 군락을 이룬 고사리가 초식동물이 먹었을 법하다고 느낀 것은 단순한 느낌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공룡이 살던 중생대에도 고사리는 흔한 식물이었고, 일부 초식 공룡의 먹이로 소비되기도 하였다.


그토록 긴 시간 지구에서 살아남은 식물이라니, 똥손 식집사들 가슴 뛰는 소리가 웅장히도 들려온다. 맞다. 고사리는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끝없이 뿌리줄기를 퍼뜨리며 끈질긴 번식력으로 잘 죽지 않고 질긴 생명력을 뽐낸다. 간접광이나 반그늘에서도 잘 살아서, 관상용 고사리는 실내에서 키우기도 쉬운 식물이다.


구석자리 시멘트 화분에서도 생명력을 뽐내는 보스턴고사리


보스턴고사리는 가장 흔한 관상용 고사리 중 하나로, 보스턴에서 관상용 식물로 처음 널리 인기를 얻은 품종이라고 한다. 다른 종들보다 잎이 부드럽고, 길게 아치형으로 늘어지는 특징을 보인다. 우리 집에도 꽤 커다란 보스턴고사리가 회색 시멘트 화분에 심긴 채 거실 귀퉁이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다. 처음부터 구석에 둔 것은 아니었는데, 말썽꾸러기 강아지를 한 마리 집에 들인 후에 구석자리로 방출되었다. 강아지가 자꾸 늘어진 잎을 물어뜯으며 장난을 쳐서 어쩔 수 없었다. 광량이 부족해서 시들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계속 새순을 내며 잘 자라고 있다.


우리 집 고사리 화분은 크기가 큰 편이라 약 보름에 한 번 정도 물을 준다. 물을 주다 보면 가끔 리치먼드 공원에서 보았던 고사리 군락이 떠오르곤 한다. 고사리 군락에 깃든 원시의, 태고의 생명력이 가득한 풍경 말이다. 도시 한복판 아파트 창가에, 화분마저 회색빛 시멘트에 심긴 이 고사리 종족(?)의 길고 긴 역사를 생각하면 기분이 조금 이상해진다. 까마득하다는 말로 감히 표현이 되지 않을 만큼 멀고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이토록 푸르게 번성하였을까. 어디에서도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생을 이어가는 고요한 고사리야말로, 결국 지구의 마지막 날까지 이 별의 흥망성쇠를 함께할 존재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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