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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내디딘 한 걸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기 쓰기는 너무 어려운 숙제였어.

by 정벼리
매일 일기를 써보렴. 거기서부터 글쓰기를 시작하는 거야.


고3 여름방학, 선풍기가 탈탈 돌아가는 교실에서 선생님이 말했다.




중학교 때까지 1,2등을 도맡아오던 큰 딸에게 거는 부모님의 기대는 꽤나 무거운 것이었다. 큰 놈이 잘 되면 작은 놈은 따라간다,는 지론 앞에서 나는 어릴 적부터 자랑스러운 큰 놈이 되어야 하는 멍에를 지고 자랐다. 시키지 않아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숙제는 알아서 챙기며, 때가 되면 달력에 시험공부 계획을 세웠다.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한 동생이 어쩌다 꾸중을 들을 때에는 끝에 이런 소리가 붙곤 했다. 네 언니 좀 보고 배워라. 지역에서 공부 잘하는 애들은 다 모인다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아마 엄마아빠는 가슴을 활짝 펴고 남몰래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큰 놈은 남들 겪는 사춘기도 없이 부모 속 한 번 안 썩이고 잘 큰다고.

그러니까 그게 생애 첫 반항이었다. 여상히도 평화로운 저녁식사 중에 나는 문예창작학과에 가서 작가가 되고 싶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언젠가부터 꼭꼭 감춰둔 것을 더는 감출 수 없어 내어놓은 속내였다. 갑자기 진로를 바꾸고 싶다는 폭탄선언은 당연하게 부모님의 거센 반대와 마주했다. 판검사가 되어 훈장처럼 빛나야 할 큰 놈이 뭘 하겠다고? 엄마아빠는 충격으로 잠시 말을 잃었다. 하지만 침묵은 짧았고, 긴 훈계와 설교로 나를 타이르고 얼렀다.


선생님을 찾아 진로상담을 요청했던 것은 혼자 힘으로는 맞설 수 없는 부모님의 반대 앞에 어떻게든 아군을 구해보겠다고, 딴에 생각해 낸 SOS 비슷한 무엇이었다. 선생님, 저는 작가가 되어 글을 쓰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선생님도 제 글, 자주 칭찬하셨잖아요.


내가 간과한 것은 온 세상이 고3에게 기대하는 적절한 행동의 범주를 아무리 넓게 잡아봐도, 갑작스러운 진로변경이나 추상적인 꿈에 대한 고뇌는 포함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 학교는 상위권 대학 진학률이 높은 곳이었고, 3학년 교무실의 모든 관심사는 어떻게 애들 수능 점수를 1점이라도 높일지, SKY에 한 명이라도 더 보낼지하는 문제에 쏠려 있었다.


그날 나는 책상 가운데 한 점을 매직아이 하듯 내려다보고 있어서 선생님의 표정을 마주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마도 혼란이 가득했으리라 생각된다. 수능이 백일도 안 남은 때에 뭔 놈의 진로 타령인가, 수학문제라도 하나 더 풀지 이게 무슨 시간낭비인가, 싶었을 것이다. 아니면 학업스트레스가 심한 탓에 핑계로 점철된 탈출구를 찾는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어쨌든 상담자의 기본 매뉴얼을 훌륭하게 따랐다. 경청 - 공감 - 재진술 - 탐색 - 대안제시와 응원. 그랬구나. 벼리 글 좋은 건 선생님도 알지. 원하는 진로와 부모님의 바람이 달라서 맘이 편치 않겠구나. 근데 꼭 글쓰기를 전공해야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야. 중요한 건 경험과 연습이지. 오늘부터 매일 일기를 써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작가가 되기 위한 좋은 습작이 될 거야. 우선 지금은 공부에 매진하자.


역시 먹어본 놈이 먹을 줄 알고, 놀아본 놈이 놀 줄 안다. 반항도 해봤어야 버틸 힘이 있다. 나는 끝내 매가리 없이, 감히 투쟁은 꿈도 꿔보지 못한 채 마음을 접었다.




선생님의 말이 꼭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영혼 없이 내놓은 대안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매일 글쓰기를 이어가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이 갖춰야 할 소양임을 부정할 수도 없다. 핑계 같지만, 돌이켜보면 제시된 시작점이 일기라는 것은 문제였다. 한동안 일기를 쓰려 노력했다. 번번이 실패했다. 나에게 일기는 꿋꿋이 이어가기엔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천성이 예민해서인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님을 알면서도 일기장에 나를 고백하는 일은 그저 괴롭고 아팠다. 즐겁지 않았다. 내 글쓰기의 시작은 일기의 망령에 발목이 잡혔다. 일기도 못쓰는 게 무슨 작가가 되겠다고... 오랫동안 꿈을 포기하고 지냈다. 원하는 일이라고 다 잘할 수는 없는 것이지, 어떤 일이든 제 몫하며 살고 있는 게 어디야, 스스로를 다독였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문득 생각했다. 왜 잘해야 하지? 좀 모자라면 어때. 일기 말고 아무거나 쓰고 싶은 걸 쓰면 되지. 쓰면서 아픈 글 말고 즐거운 글을 써보지 뭐. 자유롭게 내디딘 한 걸음이 요새 나를 자주 웃게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기 쓰기는 너무 어려운 숙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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