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와 그림자로 남은 기억
당신은 생애 첫 기억에 대해 떠올려본 적이 있는지.
당신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의, 생의 가장 오래된 그 기억은 어떤 이야기와 감정을 담고 있는지.
이른바 '오글거림'은 시대착오적 행태로 취급되곤 하는 요즘 세상에서 감성이라는 이름의 청승을 떨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어쩌다 흔치 않은 그런 기회를 잡은 날이면, 나는 마주한 사람에게 생의 첫 기억을 물을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는 듯 서서히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가족 또는 그 시절 가깝게 지냈던 이웃이나 친구와의 즐거운 한 때를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의 얼굴에는 조금 슬픈 표정이 깃들기도 하고, 누군가는 당황하며 생애 첫 기억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혼란을 표하기도 한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은 사람마다 그 시기가 다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아동기 기억상실 때문인데, 만 3~4세를 기점으로 우리는 그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을 대부분 잃어버린다. 만약 아동기 기억상실이 없었다면, 누구든 생애 첫 기억은 분만실에서의 밝은 빛과 응애, 터져나간 자신의 울음소리 따위의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다행히도 생애 첫 기억은 아동기 기억상실이 끝나갈 무렵의 어떤 시점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많은 기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남들과는 다른 각자의 출발점을 갖게 된다.
왜 어떤 기억은 지워지고, 어떤 기억은 살아남아 수십 년이 지난 이후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려지는 것일까?
생애 첫 기억이 선정되는 경위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몇 가지 유력한 가설은 존재한다. 우선 종류를 불문하고 거센 감정이 동반된 경험은 우리 뇌가 중요한 것으로 판단하여 장기기억에 저장시키기 쉽다고 한다. 보통 자기 관련성을 가진 사건이 많기 때문에 성장과정에서 개인의 정체성, 핵심 감정과 이어지게 되고, 종래에는 첫 기억이 일종의 대표장면이나 썸네일처럼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다. 또 기억은 언어 체계로 정리되는 만큼, 아이가 언어능력을 갖춰가며 어떤 강렬한 경험이 이야기 형태(Narrative formation)를 갖추고 반복적으로 회상되면서 점차 주요한 장면으로 뇌에 고정되게 된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생애 첫 기억은 우연히 남은 기억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제와 맞닿은 경험이 선택된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
내 생애 첫 기억은 만 세 돌이 넘었을 무렵의 어느 날로 추정된다.
맞벌이 부부였던 엄마아빠는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첫째 아이를 주중에는 남편의 부모님에게 맡기고 주말에 데려오기를 반복했다. 일요일 밤마다 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돌아서며 엄마는 매주 울었다고 했다. 그래서 둘째를 임신한 후, 젊은 엄마아빠는 고심 끝에 언덕배기 이층 집을 구입하고 고향에 있던 아내의 부모님과 서울에서 합가를 하게 된다. 드디어 첫째를 떼놓지 않고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엄마아빠에게는 재회와 상봉의 기쁨이었던 상황이 안타깝게도 내게는 지금껏 나를 돌봐주던 할머니와의 이별이 되었다는 데에 인생의 아이러니가 있다. 모두가 만족하는 결말은 쉽지 않다. 외할머니가 아무리 인자하게 머리를 쓰다듬어도 어린 나에게는 서먹하고 낯선 존재였을 게다.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후까지, 아장아장 나를 따라오며 귀찮게 구는 동생을 향해, '너희 할머니'에게 가, 라고 성을 내기도 했으니까.
내 첫 기억은 언덕배기 이층 집에서의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아침잠이 많아서, 기억하는 가장 오래전 그날에도 느지막이 잠에서 깼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있었고,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끔뻑거리며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아래층으로 가기 위해 방에서 나왔다. 왜 곧장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난간 사이에 다리를 대롱대롱 내려놓고 앉아있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았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아무도 내가 잠에서 깬 줄 모르는데, 나는 깨어나서 여기 이렇게 앉아있다는 것에 은밀한 즐거움도 느꼈다. 아래층에서 할머니가 틀어놓은 TV 소리가 말소리와 뒤섞인 채 어렴풋이 들려왔다. 계단은 불을 켜지 않아 아주 까맸다. 그 계단은 창문의 맞은편에 위치해서 항상 어둡게 그림자가 졌었다. 가만히 그렇게 앉아 있었다. 멀리 바깥에서 컹컹, 개 짖는 소리도 들려왔다.
꽤나 선명한 고독이었다.
먼 곳의 소리와 짙은 그림자로 남은 감정과 기억이다. 엄청 서글픈 고독은 아니었다. 지금 여기에 나 혼자구나, 하는 그런 생경한 느낌이었다. 낯선 느낌에 소스라쳐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지도 않았다. 그냥 한참을 거기 앉아 까만 계단을 한없이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날의 기억이 무척 흥미롭다. 살다보면 누구나 종종 뜬금없는 때에 나 홀로인 느낌을 받는, 고독을 자각하는 순간과 마주치게 된다. 언듯 생각하기에 고독은 상당히 고차원적 감정 같지만, 사실은 아주 어린아이도 느낄 수 있는 단순하고 쉬운 상태이다. 물론 아이의 감정이 어른에 비해 비교적 단순하고 쉬울 것이라는 생각마저 엄청난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어디서부터가 편견이고 오해인지를 차치하고, 인간은 마치 4차원 퍼즐처럼 알 수 없지만 재미있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그 누구도 한 인간을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그 어느 누구라도- 오롯이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인간이란 그야말로 완전한 해석이 불가능한 존재다. 우리는 그저 서로를 조금 더 깊이 알기 위해 허우적대며 노력할 뿐, 그 깊이에 끝이 있는지조차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영영 아주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그 사람의 첫 번째 썸네일이 궁금해질 때 이렇게 묻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생애 첫 기억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