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가 보글보글 끓어가는 시간
남편은 요리에 영 재능이 없다. 작년 초 1년간 육아휴직에 들어가며 그는 주부로 생활하는 동안 요리 마스터로 재탄생하겠다고 큰소리를 빵빵 쳤다. 그 선언과 동시에 나는 칼 같이 부엌일에서 손을 떼고, 남편이 해준 밥을 받아먹으며 매일 반찬투정을 했다. 이건 너무 짜, 이건 너무 달아, 이건 왜 이렇게 잘랐어, 이건 통째로 조리해야 더 맛깔나... 착한 그는 매번 멋쩍게 웃으며 다음엔 더 잘해주겠다고 이야기했다. 쓰고 보니 내가 너무 박정한가 싶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의 요리는 시간과 노력이라는 인풋 대비 아웃풋이 좀 서글픈 편이다. 부엌에서 끙끙대며 밤새도록 뭔가를 뚝딱거리는데, 막상 차려진 밥상은 가짓수도 적고 어딘가 어설프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서 나온 음식 중에도 맛이며, 때깔이며 흠잡을 것이 없는 완벽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보늬밤조림.
시댁에서는 가을마다 밤을 한 아름 보내주신다. 지역특산물이기도 하고, 뒷산에 밤나무가 지천이라 오며 가며 한 바가지씩 주워 모으면 그 양이 상당하다고 한다. 여기 둬봤자 누가 먹겠냐고 말하며 보내주시지만, 실은 가을 내내 손녀딸이 원 없이 밤을 까먹길 바라는 정성일테다.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로서는 매년 밤 처리 하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밤은 다른 곡물이나 견과류에 비해 수분 함량이 높고 전분질이 많아서 보관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살림고수들은 껍질 싹 벗겨서 냉동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나. 그 많은 밤 껍질을 언제 다 벗긴단 말이야. 매년 전통시장에서 기계로 밤 껍질을 까주는 아저씨를 찾아 헤매거나, 그나마의 여유도 없는 어느 해에는 박스 채로 엄마에게 보내지기도 했다.
남편의 휴직 중에도 어김없이 밤 상자가 도착했다. 아주 커다란 박스에 빈틈하나 없이 가득 찬 밤을 보고 한숨인지 감탄일지 모를 탄성이 터졌다. 그런데 남편은 다 계획이 있다며 올해는 밤에 신경도 쓰지 말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는 밤가위를 하나 사 와서 저녁 내내 TV를 보며 밤 겉껍질을 벗겼다. 포슬포슬한 속껍질에 쌓인 밤이 소쿠리 가득 쌓여가는 모습을 곁눈으로 지켜보며 나는 툭 말을 던졌다.
"그거 속껍질까지 까서 냉동해야 해. 그냥 밤 까주는 아저씨를 찾아보지 그래?"
"에헤이, 내가 다 계획이 있다니까. 당신은 지켜보다 그냥 받아먹기나 해."
나는 피식 웃으며 그러든지 말든지 내버려 뒀다. 어디서 밤의 겉껍질 속껍질 따로 벗겨 손질하는 살림 비법 유튜브라도 찾아봤나 보지.
다음날 퇴근 후, 나는 식탁에 두 줄로 가지런히 줄 세워진 갈색 병조림 행렬과 마주했다. 말로만 듣던, 영화에서나 보던 보늬밤조림이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남편보다, 딸아이가 먼저 나섰다. 신남지수가 만땅인 채로 방방 뛰어나오며 속사포처럼 외쳤다.
"엄마엄마, 보늬밤이에요! 밤의 속껍질을 보늬라고 부른대요. 아빠가 베이킹소다 넣고 몇 번이나 삶은 뒤에, 간장이랑 설탕이랑 술 넣고 조렸대요. 술이 들어갔지만 어린이도 먹을 수 있대요!"
우와, 감탄하는 나를 향해 남편은 어서 맛을 보라며 재촉했다. 결과물에 여간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밤을 담을 그릇을 꺼내오며 물었다.
"아빠랑 별이는 맛보았어?"
"엄마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지요.'
우리는 셋이 나란히 식탁 앞에 서서 보늬밤을 맛보았다. 달콤하고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오래오래 삶으면 밤 속껍질도 이렇게 부드러워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남편이 만들어둔 보늬밤은 작년 가을 겨울 내내 우리 가족의 소중한 간식이 되어주었다.
올해도 변함없이 밤 상자가 찾아왔다. 나는 찬장 높이높이 올려둔 유리병들을 와르르 꺼내며, 남편을 향해 올해도 잘 부탁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어깨가 으쓱해진 채 몇 시간이나 밤껍질 벗기기에 몰두했다. 그리고 다음날 무려 휴가까지 써가며, 밤새 베이킹소다를 푼 물에 담가두었던 밤을 세 차례나 삶아냈다. 그리고 마지막엔 간장과 설탕, 럼주를 넣어 곱게 조렸다. 짭짜름하고 고소한 향기가 퍼져갔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약불로 줄이고, 아이고 힘들다, 외치며 그가 털썩 식탁 의자에 앉는다.
그는 병마다 가득 보늬밤조림을 담아 쟁여놓고, 이 가을과 겨울이 다 가도록 나와 아이의 입에 한 알씩 쏙쏙 넣어줄 것이다. 남편의 보늬밤이 담긴 냄비가 보글보글 끓어간다.
실수로 발행했던 글을 삭제하여 다시 썼습니다. 잊기 전에 얼른 복기해보았지만, 어쩐지 첫번째 글이 담고 있었던 몽글몽글함이 덜어진 것 같은 것은 그저 제 기분탓이길 바라봅니다.
솔직히 썼던 글을 실수로 지웠던 것은 이번이 두 번째 경험인데, 첫번째엔 노트북에 작업해둔 초안이 있어 어렵지 않게 복원할 수 있었는데, 이번엔 브런치에서 직접 작성한 글이라 도리 없이 기억을 되살려 다시 써야 했습니다.
부디 브런치의 삭제버튼의 위치를 더 누르기 어려운 위치로 바꿔주시길 바라보고, 라이킷을 눌러주셨던 많은 분들에게 안타까움 가득한 사과와 감사를 전하고, 다른 작가님들에겐 이런 맹추같은 손가락 놀림이 없으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