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두자는 조용한 속삭임
웅크린 너에게.
안녕이라는 인사는 붙이지 않을게. 나는 지나온 모든 시간 안에서 괜찮지 않았던 너에게 말을 건네려 하고 있으니. 하지만 너에게 무엇이든 써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첫 줄을 쓰고 나서 커서가 깜박이는 동안, 오래오래 나는 가만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어.
그러고 보니 가만히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처럼 너와 나에게 잘 어울리는, 동시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 또 있을까. 우리는 늘 우리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초조하게 발을 구르면서도, 어떻게든 나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걸었지. 애쓴 노력이 무색하게 그 발걸음은 그저 서성거림에 그쳤던 날이 많았고. 아무리 바삐 걸어보려 했어도 돌아보면 가만히 그곳에 머물렀더라. 아무것도 이겨내지지 않고, 아무것도 괜찮아지지 않고.
그래서 가끔은 생각해. 한 번 생긴 생채기가 나아지는 것은 어쩌면 아예 존재할 수 없는 현상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야. 아무리 토닥이고, 약을 바르고, 울컥울컥 쏟아보아도 다시 마주하면 또 아파. 아무리 멀리 있어도, 너를 떠올리면 나는 다시 아파. 너를 생각해도 아프지 않은 날이 언젠가 올 수는 있을런지, 잘 모르겠어.
그러면 또 슬퍼져. 이만큼의 시간을 기억하는 동안 괜찮지 않았던 너의 모습이 이토록 차곡차곡 쌓여왔는데,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의 카테고리가 과거로 바뀌어가는 동안 또 얼마나 괜찮지 않을까. 아무렇지도 않은 날이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만큼의 슬픔이나 고통,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잘 지내는 건지. 모두들 그냥 애써 묻어두고 다시 찾지 않은 채 외면하면 사는 것일까.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 큰 바다를 생각해 보라고. 얼마나 넓고,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살고 있고, 찰나의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별 것 아닌 일들이 쏟아지는지 말이야. 그래도 괜찮아지지 않는다면 이번엔 우주를 떠올려보래. 태양계와 은하, 그 너머까지 펼쳐진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공간을 생각하면 오늘의 고민이 얼마나 하찮은 일인지 깨닫게 될 거라고.
하지만 한 번 슬퍼지기로 결정한 마음에게는 항상성이라는 것이 있는 걸까. 나는 그것조차 슬펐어. 나의 온 세상을 쥐고 흔드는 거대한 파도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음이라면, 그 하찮음에도 이토록 흔들리는 너와 나는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미물이라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텐데. 우리가 서로를 할퀴어서는 안 된다는 굳은 명제, 그 명제가 하는 수 없이 깨어진 뒤 남은 상처를 안고 몸부림치는 밤, 디뎌내고 나아가보려는 애달픈 모든 노력들은 어떤 차원에 놓여 있는 것일까. 우주나 대양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도, 나의 작은 방만은 가득 채우고도 넘쳐흘러 어찌할 줄 모르겠는데 말이야. 우리는 왜 별것 아닌 일을 별것으로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걸까.
그래서 말인데, 이제는 그냥 둘까 싶어. 긴 시간 왜, 어째서, 어떻게라는 수많은 질문을 꾸역꾸역 끌어왔지만 아무런 답도 찾지 못했어. 끙끙대며 애를 써봐도 추상화나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또한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떤 미지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것이지. 피가 나면 상처난대로, 눈물이 나면 슬픈대로. 멈추는 법을 모르니 그냥 두자. 내가 너의 흔적을 그대로 두는 것이 너에게는 또 다른 슬픔일지, 혹은 안도일지 그조차도 잘 구별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라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야.
생각이 모래바람처럼 스산히 일어나고 흩어지는 밤이라, 조용히 속삭여 볼게. 고요한 속삭임이지만, 종이가 뚫릴 만큼 꾹꾹 눌러써보는 다짐이야. 그 모든 하찮은 고통이 우리를 집어삼켰을 때에도 어떻게 지나왔는지 모르게 지나온 것처럼 이 또한 지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보면서. 괜찮아지지는 않더라도, 스러져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그렇게 가만히 머무를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이야.
나의 밤이, 너의 밤이 오늘은 더 평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