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문에 네가 주춤하지 않도록, 더 노력할게.
나는 코찔찔이 어린 시절 매년 반장선거에 나갔다. 반장이나 회장이 된 해도 있었고, 부반장이나 부회장이던 때도 있었고, 똑 떨어진 해도 있었다.
재밌는 건 우리 엄마도 나처럼 워킹맘이었는데, 엄마는 매년 내가 반장선거에 나가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셨고, 내가 학급임원이 되었다고 하면 그저 밝게 웃으며 축하인사를 건네오셨다. 그래서 나는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날 때까지 전혀 몰랐다. 학기 초마다 엄마는 다른 학급임원 엄마들에게 일종의 선제적 조치로써 깊은 사과의 말씀으로 인사를 텄고, 소풍이나 운동회에는 다른 임원 엄마들보다 다만 몇 만 원이라도 더 얹어 보태셨다는 엄청난 사실을 말이다.
"엄마는 왜 그런 얘기를 한 번도 안 해줬어?"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서야 뒤늦게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경악하며 외쳤다.
"그런 걸 네가 알면 주눅 들어 다음부터 반장 안 한다고 할까 봐 그랬지."
엄마는 무심하게 말했다.
감동받았었냐고? 아니. 그냥 아, 그렇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제 아이를 키워봐야 부모 맘을 안다는 옛말이 (진리일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지난주에 아이의 생애 첫 반장선거가 있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고학년에서만 학급 임원을 선출한다고 하더라. 그동안 매체에서만 접하던 '반장'이라는 존재는, 아이에게 신비롭게 반짝거리는 타이틀이면서 동시에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자리인 건지 아리송한 그 무엇인 것 같았다.
아이는 하루에도 네다섯 번씩 질문을 던져왔다.
"엄마, 반장선거에 나갈까? 말까?"
"엄마, 반장이 되면 재밌을까? 귀찮을까?"
"엄마, 반장이 되면 뭘 하는 걸까?"
"엄마는 어렸을 때 반장 해봤어? 좋았어?"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차렷 경례 우렁차게 외치고, 때때로 선생님 심부름을 다닌 것을 빼면, 반장이라고 딱히 뭔가 대단한 일을 했던 것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아이 교육상 대답을 잘해야지.
"반장이 되면, 친구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니까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규칙도 잘 지키고, 친구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야지."
내 대답이 너무 추상적이었는지 아이는 고개만 갸우뚱하더니 다시 물었다.
"엄마는 내가 반장선거에 나갔으면 좋겠어?"
"엄마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네 맘대로 하렴."
그다음 날이던가,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데 반장선거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다. 우리는 고만고만한 때 결혼을 해서 비슷한 또래 아이들을 가졌다. 친구의 아이가 이번에 부반장이 되었는데, 반장 엄마가 워킹맘이란다.
친구네 동네는 신도시라 학급별 어머니 모임이 꽤 활발한 편인데, 이제 모임 일정이며, 회비정산이며 일거리를 다 혼자 안게 되었다고 푸념을 했다. 똑똑한 아이를 둔 덕택에 생긴 일거리이니 즐겁게 떠안으라며 웃다가, 불현듯 내가 학급임원을 맡을 때마다 사과로 인사를 하고 가욋돈이 나갔다던 엄마 생각이 났다.
뭐야, 별이가 반장이 되면 나도 다른 임원 엄마들에게 번번이 이런저런 모임 불참에 사과를 해야 하고, 나가지도 않는 모임 회비를 웃돈까지 얹어 내야 하는 거야? 승진을 하며 지방발령을 받아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온 터라, 나는 아직 내가 사는 고장이 낯설고, 아는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 회사일이 정말 바쁘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그날 저녁 아이는 어제처럼 다시 내게 물었다.
"엄마, 나 반장선거 나갈까, 말까?"
"글쎄.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벌써 내 말투가 어제보다 조금 떨려오는 듯한, 혼자만의 느낌이 든다.
"내가 반장이 되면 엄마가 날 더 자랑스러워하겠지?"
나는 덥석 아이를 붙잡고 말했다.
"별아, 너는 이미 엄마에게 우주 최고로 자랑스러운 아이야. 네가 반장이 아니라 반장 할아버지가 된다고 해도, 지금보다 네가 더 자랑스러워질 수는 없어. 너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완벽하단다."
아이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얘는 감동받은 게 틀림없었다.
엄마의 충만한 사랑(?)에 만족한 아이는 웃으며 잠자리에 들었는데, 나는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방금 내가 한 말, 거짓말은 아니지만, 사실 애가 반장선거에 안 나갔으면 싶어서 뱉은 말이라는, 부인할 수 없이 명백한 사실이 양심을 콕콕 찔러왔다.
엄마, 나한테 진실을 왜 알려줬어. 그냥 영영 모르게 하지. 괜히 생각만 많아졌잖아... 현명하고 속 깊은 엄마에게 감사하기는커녕, 못난 나는 진실을 알게 하였다며 엄마에게 괜한 원망이 뻗쳤다.
별이는 결국 반장선거에 나가지 않았다. 반장이 되면 수요일마다 임원회의에 참석해야 하는데 미술학원 시간과 겹친다나... 몇 달을 졸라 겨우 다니게 된 미술학원을 반장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었단다.
나 때문은 아니라 다행이다. 엄마가 소심하고 이기적이라 네 발걸음을 주춤하게 만들지 않도록, 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할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너에게 절대, 결단코, 영영 나의 발언에 숨은 진의를 밝히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