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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잇는 워킹맘들의 이야기

워킹맘 엄마와 워킹맘 딸

by 정벼리

엄마도 젊어서는 워킹맘, 아침마다 나와 동생을 할머니에게 맡긴 채 출근을 했다. 그러니 어쩌면 내 아이를 돌본 것이 엄마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첫 육아였을지도 모른다. 이전 글에서 몇 번 언급했지만, 재작년까지는 엄마와 지근거리에 살면서 낮시간 아이 돌봄을 부탁드렸었다.


당연히 엄마는 한 아이의 '낮'을 키워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돌발상황이 생길 때마다 엄마는 당황해서 나에게 전화를 하였고, 외동딸을 키우는 나라고 답을 알리가 없으니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동동 발을 굴렀다. 엄마와 나는 자연스럽게, 애 하나 키우는 게 뭐가 이렇게 어렵니,라는 한탄을 서로 주고받았다.


하지만 엄마는 워킹맘으로서의 고민과 난제들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이 좋은 세상에 애를 키우면서 불평불만뿐인 나약해빠진 요즘 것이라며 나를 가장 매섭게 몰아세우는 사람이었다.

우리의 대화패턴은 주로 이랬다.


"아이고, 고생했다. 이 시간까지 일하느라 고되지?"
"응, 나 너무 피곤해."
"얼른 씻어라."
"엄마, 내일 또 야근일 것 같아요. 내일은 별이 아빠 오면 그냥 가요."
"상황 봐서..."
"오늘도 뭐 하러 이 시간까지 있어."
"그럼 설거지도 산더미고, 거실도 난장판인데, 두고 그냥 가니?"
"두고 그냥 가!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언제 해? 밤 11시 넘어서야 들어오면서... 내친김에 거실 바닥 손걸레질 했다. 청소 좀 꼼꼼히 하고 살아라! 닦다 보니 구석구석 드러워서 원. 아이고, 허리야."
"그러니까 뭐 하러 손걸레질을 해! 맨날 허리 아프다고 하면서!"
"얘는 도와줘도 승질이야!"
"미안해서 그렇지! 에잇, 왜 육아휴직은 1년밖에 안 되는 거야. 아직도 온종일 손 가는 아기인데. 힘들고 속상해서 못해먹겠어..."
"호강에 초 쳤네! 야, 옛날엔 애 낳고 한 달 만에 출근해서 일했다. 지금껏 쉰 것이 어디냐! 그리고 너어어는 엄마가 애 봐줘, 밥 차려줘, 청소해 줘, 애도 남편이 씻기고 재우고, 뭐가 맨날 애 키우는 게 힘들다고 징징이야."
"나도 한다고! 오늘도 6시에 일어나서 애 가방도 챙기고, 알림장 앱도 챙기고, 집안일도 하고 한다고!"
"어이구, 나는 네 나이 때 새벽 5시에 일어나면 늦잠이었다!"


어휴, 돌이켜 생각해도 속 터져.


하지만 정말 속상한 것은, 엄마 말에 도무지 반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삼사십 대는 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바쁘고 고됐다는 점이다. 엄마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밥상을 정갈하게 차려놓고 출근을 했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매일 새 반찬으로 저녁을 뚝딱 차려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 집은 늘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였고, 학창 시절 빨래가 쌓여 양말이 부족했던 날은 맹세코 단 하루도 없었다. 우리 엄마는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슈퍼우먼 그 자체였다.


왕년의 슈퍼우먼에게는 아이행복카드, 지자체의 출산선물, 양육수당, 출산휴가, 육아휴직 등등, 지금 세상에서 디폴트 값인 모든 임신, 출산, 육아 관련 제도들이 그저 찬란하게 빛나는 시혜적 조치로 비치는 것이다. 뭐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맞다. 제도는 날로 좋아지고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제도가 있다는 것과 그 제도를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 회사 S가 출산을 앞두고 부서를 옮거야 했던 것처럼. 여전히 많은 이들이 눈치를 보며 출산휴가를 쓰고, 육아휴직은 ‘커리어를 포기하는 선택’처럼 받아들여진다.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라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순간부터 조용한 불이익이 시작되는 현실은 여전하다.


비단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한 제도 뿐만이 아니다. '칼퇴'라는 말이 존재할 정도로 이상하게 긴 근로시간, 존재는 하지만 활용하기 어려운 유연근무와 재택근무. 주어져도 갖가지 이유로 다 쓰지 못하는 연차와 여러가지 특별휴가들...


제도 못지않게 중요한 건, 그 제도가 자연스럽게 사용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사회 분위기라는 생각이 든다. 임신과 출산, 육아가 개인의 선택이자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존중받고 환영받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제도가 만들어낸 틀 위에 실질적인 지지가 쌓일 때, 진짜 ‘아이 키우기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 날로 좋아지는 제도만큼, 우리 사회의 인식과 문화도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날로 좋아지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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