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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마음과 평온을 찾아서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복작복작해지는 것은 그저 기분 탓인가.

by 정벼리

작년 한 해간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고 집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외벌이 가장 맛보기를 경험해 보았다. 가계소득이 줄어들었으니 경제적인 면에서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다시는 살 수 없을 귀한 시간을 보냈다고 평가한다.


이십 대 후반에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남편은 처음으로 긴 휴식을 가졌다. 아이와 지지고 볶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집안일 쳇바퀴에 갇혔으면서도 남편은 꽤나 그 시간을 즐겼다. 물론 복직을 앞두고는, 이제 휴직은 충분한 것 같다며 다시 사회인으로 돌아갈 때가 온 것 같다고 슬그머니 고백하긴 하더라만...


나는 마음의 평화를 맛보았다. 내 손을 타야 할 집안일이 줄어들어 시간이 넉넉해진 것은 물론이고, 그냥 하루 온종일 마음과 머리를 덮고 있던 걱정과 불안의 층이 싹 벗겨내진 기분이었다. 아이가 독감에 걸려 학교를 못 나가도 나는 제시간에 회사에 나갈 수 있고, 아이 치과 정기검진이 언제인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녹색 어머니 불참란에 체크하며 구구절절 사과의 메시지를 적지 않아도 되고, 갑자기 야근할 일이 생겨도 가족들에게 미안할 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날 덮치지는 않았다. 삶이 이렇게 심플할 수 있다니. 어떤 의미로는 엄마가 해주는 밥 먹으면서 학교 다니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더라.


남편이 복직한 이후, 초조와 불안의 구름이 다시 마음의 상층부에 내려앉았다. 내 마음은 항상 아이와 회사 두 곳에 동시에 머무르느라 조용할 틈이 없다.

고요와 평온의 안온함을 끝내 경험하지 못했다면 모를까, 한 번 맛보았던 그것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단순하고 가벼운 삶이 주는 평온을 이렇게 놓치고 살 수 없다는 욕망(?)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럼 뭐 하나. 현실에서 나를 기다리는 육아와 가사의 숙제들은 도저히 없앨 수가 없는 것을.


결국 마음의 문제이다. 다 집어던지고 홀로 산속에 들어가 살 수도 없으니, 내 마음은 내가 다스려야지 싶었다. 그래서 별별 노력을 해봤고, 그중 몇 가지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한동안은 마음 다스리기에 관한 책을 사모아봤다. 별 도움은 되지 않더라. 어떤 건 읽을수록 속 시끄러워졌고, 어떤 건 고리타분했고, 또 어떤 건 읽는 동안 공감하며 무릎을 치다가도 덮으면 어쩐지 공허했다. 그 시간에 소설책이나 볼 걸, 싶은 기분을 몇 번 반복한 후에 마음 다스리기를 책으로 배우기는 포기했다.


그다음엔 종교의 힘을 빌려보기로 했다. 아니, 빌려볼까 해봤다. 나는 무늬만 천주교 신자, 천주교식 표현으로는 냉담 중인 신자이다. 그래도 살면서 두어 번쯤 정말 딱 죽겠다 싶을 때에, 사람에게 기대지 못하는 마음을 교회에 기대며 그 시간을 견뎌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그렇게 딱 죽겠다 싶을 정도는 아닌가 보다. 주말마다 미사에 나가려는 마음을 먹어보았으나, 그때마다 나를 찾아오는 속세의 온갖 유혹에 매번 철퍼덕 굴복해 버렸다.


매일 아침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는, 짧은 글귀를 필사하고 있다. 마음에 새기는 것까지는 아니고, 그냥 좋은 말, 예쁜 말, 사랑스러운 말 한 줄을 따라 쓰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고요 속에 머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시작해 보았다. 온종일 지속되는 효과는 솔직히 모르겠고, 펜을 잡고 글씨를 써 내려가는 시간 동안, 그러니까 적어도 의도했던 최소한의 시간 동안은 불쑥 솟던 마음이 내려앉는 것도 같아 당분간 계속해보려고 한다.


몇 가지 더 있다. 저녁에는 운동 겸 요가원에 가서 깊은 숨을 쉬고, 창가에서 키우는 라벤더 화분에는 보랏빛 꽃이 올라오고 있고, 플레이리스트에 수록된 곡명도 계속 늘어나는 중이다. 자꾸 노력하고 다스리려 하다 보면, 언젠가 바다처럼 잔잔한 마음과 들썩이지 않는 평온이 찾아올까.


써놓고 보니 조금 이상하긴 하다. 노력하면 할수록 자꾸 생활이 더 복작복작해지는 것은 그저 기분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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