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집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걸까 (2)
* 이 글은 앞 이야기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마당 있는 집에 사는 게 제 꿈이에요 /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집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걸까 (1)
"여보, 별이가 아까 당신 오기 전에 지나가는 말처럼 얘기했는데, 얘는 마당 있는 집에 살아보는 게 꿈이래."
"응? 그럼 나중에 퇴직하고 우리가 마당 있는 집에 살아야겠네."
"아니, 별이는 당장을 말하는 거야. 호두랑 마당에서 뛰어노는 것이 무려 평생의 꿈이래."
"우리가 생각하는 동네들에 마당 있는 집이 어딨어."
"그치. 근데 내가 아이 말을 듣고 문득 든 생각이 말이야. 우리는 왜 학군지에 가서 살겠다고 생각을 한 걸까. 그게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맞는 방향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렇지..."
사실 우리 부부는 도심 한복판에 살 때에도 백화점이나 극장보다는 손 잡고 한갓진 산책을 나가길 택했다. 번잡함은 딱 질색인지라 우리가 내 집 마련을 하지 못한 사이 서울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도 그저, 누군가는 참 좋겠구나, 남 일처럼 여겨왔다. 어차피 서울 한복판에 무리해서 집을 장만한다고 하여도 그곳에 주거로서 머무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을뿐더러, 우리가 나중에 정착하겠지 싶은 작은 소도시들은 그렇게 크게 부동산이 폭등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물론 경제 이치에 밝은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두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혀를 찰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나는 그랬다.
아주 예전에, 결혼하기 한참 전부터 자주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나중에 엄마아빠 집 말고 가족을 꾸려 내 집을 가지게 될 때엔 침엽수가 빽빽한 숲이 보이는 곳에 아주 작은 정원과 큰 창이 있는 집에 살고 싶다고.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난 내가 너무 무리하지 않고 관리할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정원을 가꾸면서, 날이 더우면 더운 대로 창 밖의 무성한 초록을 내다보고, 추우면 추운 대로 눈 구경을 하며 따끈한 차 한 잔 손에 쥐고 숨 쉴 수 있는 삶을 꿈꿨었다. 그땐 경쟁일로의 질주 같은 생활이 버거워서 더 그런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적어도 우리 집에 들어서면 바깥세상의 풍파로부터 모두 단절된 채, 그저 안온하기만 할 수 있는 공간이 내가 가꾸고 싶었던 '집'이었다. 그 기억에 생각이 미치자, 학군지에서 아이 공부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진정 우리 부부와 아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인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셋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 앉아 큰 결심을 하나 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집의 형태와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백지에서 다 함께 다시 생각해 보자고. 아직 이사 갈 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오늘부터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우리가 원하는 삶을 찾아가 보자고. 아이에게도 어떤 형태의 공부를 하고 싶은지 스스로 생각해 보고, 함께 방향을 의논해 가자 이야기했다. 곰곰이 생각하고 의논한 끝에도 교육환경이 잘 갖추어진 동네로 가야 한다는 결론이 날 수도 있으니, 모든 방향을 열어두고 다시 고민해 보기로 한 것이다.
아이는 성인이 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곁을 떠나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때에도 아이가 원하는 집과 삶이 지금과 같이 엄마아빠의 그늘 아래에서 호두와 마당을 뛰어노는 것이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나 또한 그렇다. 언제까지 나중에, 나중에 하며 내가 원하는 삶을 미래의 나에게 미루고 살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원하는 것은 나중이 아닌 오늘 쫓으며 사는 것이 후회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인생은 유한하고, 가버린 하루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새삼 기대에 찬다. 이 다음 우리가 이사 갈 집은 과연 어디일까. 우린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내일을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