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서 교직 수업으로 교육과정에 대한 수업을 들을 때 ‘잠재적 교육과정’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다. ‘잠재적 교육과정’이란 공식적 교육과정에서 의도, 계획하지 않았으나 학생들이 은연중에 배우는 경험된 교육과정을 의미한다.(홍후조(2002), 『교육과정의 이해와 개발』, 문음사, 49쪽 참고) 실제 학교 현장에 나와보니 교사나 학교가 의도한 교육과정만큼 잠재적 교육과정도 학생들에게 중요한 영향과 배움을 주는 경우가 많은데, 나에게는 이번 여행이 그러했다.
스위스 취리히 교육부부터 이탈리아 피렌체 문화재 복원학교까지 여섯 개의 기관 인터뷰를 섭외하고 여행을 하며, 이곳들은 평소 흔한 쉽게 갈 수 없는 곳들이었기에 출발 전부터 공을 들여 참 많은 준비를 했었다. 교육과정의 개념과 명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겠지만, ‘인터뷰 기행’은 어느 정도는 계획하고 의도한 ‘공식적 교육과정’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런데, 여행을 하다 보니 출발 전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사람들을 만나며 은연중에 배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랬고, 정말 느슨하게 계획했던 인터뷰와 인터뷰 사이 여행 장소들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출발 전에는 사실 인터뷰 섭외와 준비만으로도 벅찬 면이 있어서 여행의 공식적 교육과정에만 집중했다면, 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여행이 나에게 선물한 ‘의도하지 않은 배움과 감동’인 ‘잠재적 교육과정’ 또한 굉장히 귀하게 다가왔다. 인터뷰 장소가 아니었던 이탈리아 아씨시(Assisi)와 네덜란드 하를렘(Haarlem)은 책 제목을 ‘아씨시와 하를렘’으로 정할까 초반에 고민할 정도로 요즘 말로 최애 도시가 되었고, 이외에도 이탈리아 베로나(Verona), 스위스 장크트갈렌(St. Gallen), 독일 베를린(Berlin), 프랑크푸르트(Frankfurt),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바티칸(Vatican)과 마지막 돌아오는 비행기 안까지……. 여행의 모든 공간은 배움의 터전이었다.
3장에서는 이 의도하지 않았던 공간에서 일어난 배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공간을 떠올리며 그곳에서 일어난 배움을 생각하다 보니, 그 배움의 X축과 Y축은 각각 ‘사람’과 ‘경험’이었다. 나만의 공식으로 표현해보자면,
여행자의 공부법 = 사람 X 경험
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부터 여행 평면에서 한 도시씩 좌표를 찍어가며 2019년 여름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첫 번째 좌표는 (무명의 수녀님, 수녀원 이색 숙박)=아씨시이다.
두 번째 찾는 이탈리아였다. 2004년 첫 배낭여행 때 베네치아로 향할 예정이었던 야간열차에서 출발 전 가방 전체를 도난당한 후, 친구의 여권 분실로 우리는 그 여행에서 이탈리아 일정을 통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2010년 처음으로 방문했던 로마에서도 마지막 날 버스에서 지갑을 도난당할 뻔한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탈리아는 멋진 유적과 맛있는 파스타, 피자의 유혹에도 내 머릿속에는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나라였고, 이후에도 10년 동안 영 인연이 닿지 않았다. 로마 트레비 분수에서 동전을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오고, 사랑하는 인연도 만날 수 있다는 속설을 굳게 믿으며 마음을 가득 담아 분명 동전을 던졌었는데, 이탈리아와는 참 인연이 없구나 싶을 때쯤 이번 교육기행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동선을 짜며 꼭 넣고 싶은 도시가 있었으니, 바로 ‘아씨시’였다. 사진 속 평화로운 소도시의 풍경에 매료되었고, 무엇보다 수녀원에서 1박을 할 수 있다는 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내게 이탈리아는 치안이 불안정한 도시여서 숙소를 정할 때도 다른 곳보다 특히 더 신중했는데, 수녀원이라니……. 한 번도 묵어본 적이 없어 어떤 곳인지 잘 몰랐지만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게다가 정보를 찾다 보니 한국인 수녀님이 계시는 곳이었다. 좋아, 아씨시에서는 수녀원 숙박을 하겠어!
그런데 문의 결과 안타깝게도 우리가 방문하는 달 내내 각국의 수녀님들이 모이는 콘퍼런스가 잡혀 있어 숙박 예약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어 인터넷 검색으로 나오는 수녀원은 그곳 한 곳이어서 나는 처음에는 이제 수녀원 1박은 아예 못 하는구나 싶어 크게 실망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영어 검색 결과 아씨시는 수도원의 도시라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도원이 있었다. 우리는 그중 처음 문의드렸던 수녀원에서 추천해주신 ‘Monastery S. Andrea’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7월 22일 아씨시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로마 테르미니 역(Stazione Termini)으로 갔다. 로마를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테르미니역은 항상 복잡하고 붐비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이날은 상황이 좀 심각했다. 알고 보니 200분 이상의 기차 연착과 표를 환불, 교환하기 위한 사람들로 북새통, 아니 전쟁통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우리는 유레일패스(Eurailpass) 소지자였고(참고로 유레일패스는 유럽의 24개국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횟수 제한 없이 자유롭게 국유철도를 이용할 수 있는 승차권이다. 처음 탑승하는 도시에서 유레일패스를 개시한 후, 이동 경로 및 탑승 일시를 기재하는 방식으로 이용이 가능하다.) 이제 막 유레일패스를 개시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반드시 창구에 들러야 했는데, 이건 뭐 사람에 치이고 짐에 치이고 경계를 알 수 없는 줄에 외국이라 미처 파악할 수 없는 상황까지 겹치며 지옥을 방불케 했다.
모두가 ‘로마 탈출기’를 찍고 있는 상황이었다. 역을 오가며 상황을 파악하고 고민을 한 끝에 우리는 자동으로 표를 살 수 있는 기계에서 아씨시행 티켓을 새로 샀다. 유레일패스를 개시만 하면 공짜로 아씨시에 갈 수 있었지만, 줄이 너무 길고 복잡해 언제 로마를 떠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기차들이 줄줄이 연착이 되고 있어서 아씨시행 열차도 출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다행히 열차는 제시간에 출발했고, 시간과 돈을 바꾼 우리는 무사히 아씨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니 복잡한 로마와는 사뭇 다른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졌다. 우선 짐을 들고 예약한 수녀원으로 이동을 하기 위해 길을 검색했더니, 버스+도보의 방법을 추천했다. 도보 거리가 그리 가까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행 중 캐리어를 끌며 걷는 건 늘상 있었던 일이기에 충분히 이동이 가능하다고 판단해 일단 버스를 탔다. 구불구불 길을 올라가며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광은 우리를 중세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었다. ‘현대의 서울’에서 ‘고대의 로마’로, 그리고 이제 ‘중세의 아씨시’로 들어가는 이 느낌은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까지 함께 이동하는 타임머신을 탄 듯했다.
한 손으로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은 채로 바깥 풍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에 도착을 했다. 내려서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할지 길을 딱 찾고 고개를 들어보니, 우리 눈앞에는 엄청난 언덕이 놓여 있었다. 헉! 이제까지 숱한 길을 걸어봤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각도의 언덕이었다. 설마, 여기가 맞나? 다시 지도를 검색했다. 다시 봐도 이 길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캐리어를 끌기 시작했다. 일단 저기까지만 가면 괜찮겠지. 그런데 이거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날은 덥고 숨은 턱끝까지 차고 무엇보다 팔은 빠질 것 같은 고난의 행군이 계속됐다. 더 힘이 들었던 건 이 길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막막함이었다. 중간쯤 포기할까 생각도 했었는데, 언덕을 내려다보니 이제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내가 캐리어를 끄는 건지 캐리어가 나를 끄는 건지 캐리어와 한 몸이 되어 사투를 벌이다가 약간 각도가 줄어든 광장 비슷한 곳에서 다시 길을 물었다. 손끝이 향하는 곳을 눈으로 따라갔더니 오 마이 갓! 지금까지 올라온 곳보다 더 가파른 언덕을 제법 더 올라야 했다. ‘하아, 예약을 잘못했구나. 내가 생각한 수녀원 1박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갔는데 별로면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다른 숙소를 잡아야 하나?’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고 비록 아주 높은 곳이지만 눈앞에 있는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원래 눈앞에 있는 게 생각만큼 가깝지는 않은 경우가 많다. 와,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네. 이제는 관광객들까지 우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 말도 안 되는 각도의 언덕을 한짐을 들고 오르는 우리의 모습은 아씨시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모두가 성자 프란치스코의 보호 아래에서 평온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데, 뭔가 우리만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 분명 아까 창밖으로 봤던 아씨시는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도시였는데, 그 풍광은 이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정말 이제 더이상은 무리다 포기다! 선언을 할 때쯤 눈앞에 수녀원이 나타났다. 우리는 수녀님들께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1층 입구에 주저앉았다. 수녀님들은 메일을 주고받을 때부터 이탈리아어를 쓰셨기에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지만, 캐리어와 함께 나타난 우리의 몰골을 보고 바로 상황을 짐작하신 것 같았다. 수녀님들끼리의 대화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쟤네, 여기까지 걸어왔나 봐.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뭐 대략 이런 느낌의 눈빛이었다. 캐리어와 언덕의 전쟁에서 장렬히 패배한 우리에게 수녀님들은 마치 손녀딸에게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외할머니처럼 물이며 과일이며 이것저것을 살뜰히 챙겨주시며 우리를 다독여주셨다. 긴장이 풀리니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나중에 보니 아씨시에서 짐을 들고 이렇게 높은 곳을 갈 때는 택시를 타는 게 일상이었다. 애초에 역에서부터 버스가 아닌 택시를 탔어야 하는 거였다. 분명 출발 전 마지막 메일로 역에서 어떻게 갈 수 있는지 여쭸었는데 그 메일이 잘 전달되지 않았던 게 1차 화근이었고, 지도 검색을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봤더라면 언덕길임을 알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걸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결국 이 참사가 발생했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한 그다음 상황은 정말 공포와 충격이었다. 하필 수녀원의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다시 그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야 했던 것이다. 수녀님들은 실의에 빠진 우리를 보시고 짐을 들어주시려 했으나, 잠시 캐리어를 들어보시더니 그 무게에 놀라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사라지셨다. 그리고는 바로 엘리베이터 수리공을 불러 아마도 오랜 기간 고치지 않았던 것 같은 엘리베이터를 수리하기 시작하셨다. 뭔가 우리가 수녀원에 민폐를 끼친 건가 죄송한 마음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엘리베이터를 수리하고 드디어 방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정말 침대에 그야말로 뻗었다. 이렇게 수녀원 입성이 고달플 줄이야…….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깊은 잠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석식 시간이 지나는 것도 모르고 곤히 잠든 우리를 수녀님은 손수 깨우러 방으로 올라오셨다. 세상에나,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다고 직접 방으로 찾아와 우리를 깨워주시는 숙소는 이제껏 없었다. 그래 맞아, 여기는 따뜻한 수녀님들이 계시는 아씨시였지.
이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식당으로 내려가니 수녀님께서 직접 만드신 가정식 파스타와 가지 요리 등 저녁 식사가 소담하게 차려져 있었다. 한입 먹어 보니 와! 이게 이탈리아 가정식이구나. 나는 평소 정말 파스타 요리를 좋아하는데, 그동안 내가 먹었던 어떤 고급 파스타보다도 맛있었다. 최소한의 재료와 간으로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딱 엄마가 만든 듯한 손길과 정성이 느껴지는 그런 맛이었다. 아마도 고생한 우리를 진심으로 걱정하시며 기운을 북돋아 주고 싶으셨던 수녀님들의 그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기에 더 맛있었던 것 같다.
저녁식사 후 수녀원 근처로 가볍게 산책을 나섰다. 수녀원을 나와 코너를 도니 눈에 들어온 건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과 뒤로 펼쳐지는 탁 트인 평원, 그리고 딱 그 시간대에만 볼 수 있는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빛이 조화를 이룬 모습이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아씨시의 하이라이트,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바로 옆에 수녀원이 있었던 걸 아까는 미처 몰랐다. 눈 앞에 펼쳐지는 믿기지 않는 풍광에 계속 카메라 셔터를 눌렀지만, 눈으로 보는 것을 다 담아내지는 못했다. 예쁘다, 아름답다와 같은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은 풍경을 만들어냈다.
몇 시간 전까지는 아씨시가 지옥처럼 느껴졌었는데,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을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우리는 그렇게 아씨시에 녹아들고 있었다. 아씨시는 굉장히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잠시 들렀다 다른 도시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나는 진심으로 1박 이상을 추천한다. 그리고 아씨시에서는 꼭 노을이 질 무렵 실시간으로 바뀌는 하늘빛과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조화를 이루며 빚어내는 그 풍경을 봐야 한다. 세속에서의 모든 상처와 번민을 단번에 위로받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우리는 1박을 하고 피렌체로 넘어가야 했기에 그다음 날 아씨시를 떠나야 했는데, 낮의 아씨시도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와 아쉬운 마음에 한 시간 한 시간 더 미루다 보니 저녁때가 다 돼서야 열차를 탈 수 있었다. 떠나기 전 수녀님께서 뭔가를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셨는데, 아쉽게도 이탈리아어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파파고 통역기로 계속 소통을 시도하다 보니
“Buon viaggio”
“좋은 여행”을 하라는 수녀님의 따뜻한 응원이었다. 순간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다. 여행 중 감사 인사를 해야 할 때를 대비해 준비했던 작은 선물과 통역기를 돌려 전혀 알지 못하는 이탈리아어이지만 정성껏 적은 손편지를 수녀님들께 드리며 프랑스식 비주(la bise. 유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프랑스식 볼 인사’)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Come back.”과 같은 단어로 소통하며 다시 와라, 다시 오겠다는 말이 빈말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성 프란치스코 성인의 도시인 아씨시. 프란치스코 성인이 지금도 함께 살아 숨 쉬며 그와 닮은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오늘도 아씨시를 지탱해주고 있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던 1박 2일이었다. 이탈리아에 코로나19가 한창 확산하고 있을 때, 수녀님들의 안부를 여쭙는 메일을 드렸었다. 다행히도 수녀님들은 건강하게 잘 계신다는 답장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수녀님들의 성함도 제대로 여쭤보지 못했네. 무명의 수녀님들이 계시는 아씨시는 이제 내게 ‘이탈리아 외갓집’이다. 꼭 다시 찾아뵐 때까지 무탈하게 잘 지내고 계시길, 외갓집에 가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 책을 들고 언젠가 하늘길이 열리면 꼭 감사 인사를 직접 전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