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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Oct 30. 2022

베로나=[조연 배우+관객들] X 오페라 관람

비긴 어게인: 베로나 아레나 원형 경기장으로……   

  


  비긴 어게인(Begin Again). 동명의 영화도 TV 프로그램도 ‘다시 시작’이라는 저 말 자체도 엄청 좋아하는 내 시선이 어느 날 TV에 꽂혔다. TV에서는 ‘비긴 어게인 시즌 3’(유명 가수들이 외국의 낯선 도시에서 버스킹에 도전하는 음악 힐링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마치 우리와 짜고 촬영한 것처럼 우리의 일정과 동선이 놀랍도록 일치해, ‘이탈리아-독일-네덜란드’로 이어지는 그 버스킹 프로그램에서 나는 정말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심지어 현지 촬영 시기도 우리가 다녀온 시기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그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까지 느끼며 TV를 보던 중, 11회 도시 ‘베로나’ 편에 나온 ‘아레나(Arena)’ 원형 경기장을 보며 그날의 공기와 감동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베로나를 찾게 된 건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라는 별칭에 대한 궁금증과 무엇보다 매년 여름 열린다는 ‘야외 오페라 축제’에 참여해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가능하면 여행을 다닐 때 현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에 많이 참여하는 편인데, 그중 하나가 ‘음악 체험’이다. 시차 적응에 실패해 꾸벅꾸벅 졸면서 봤던 런던에서의 나의 첫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부터 지금까지도 내 인생 공연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 클래식 공연’까지 여행 중간에 만났던 음악 공연들은 늘 우리의 여행을 더 풍요롭게 해줬다. 그런데 유독 ‘오페라’는 내게 참 어려운 장르였다. 복잡한 이야기 서사를 대부분 노래로 표현하여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고, 그렇다 보니 왠지 지루하게 느껴져 멀리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레나 원형 야외 경기장 안에서 한여름 밤에 감상하는 오페라는 설령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 공연의 일부가 되어 아레나 경기장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7월 26일, 습한 공기와 42도까지 기온이 올라 낮에는 숙소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이탈리아의 대구’ 피렌체를 떠나 베로나로 향했다.(참고로 로마에서 더위를 경험한 후 막연히 ‘피렌체는 로마보다 북쪽이니까 덜 더울 거야!’라 생각하고 역에서 내렸는데, 저녁 시간이었는데도 내리자마자 훅 들어오는 찐득한 더위에 내심 많이 당황했었다. 그런데 다음날 우피치 미술관 투어 도중 가이드님이 피렌체는 분지라서 이탈리아에서도 더운 지방이라며, ‘이탈리아의 대구’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그제야 날씨를 좀 이해할 수 있었다.) 베로나에 도착하니 확실히 로마나 피렌체에 비해서는 붐비지 않고 여유가 있어 좋았다. 나는 대도시보다 아씨시나 베로나 같은 소도시에 더 매력을 느끼는 취향을 가졌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줄리엣의 집’에 가서 벽 한구석에 메모를 남기기도 하고, ‘산 피에트로 언덕(Castel San Pietro)’에 올라 베로나 전경을 내려다보며 이 도시는 한 달 살기를 하기에도 참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사진도 찍다 보니 어느덧 공연 시간이 다가왔다. 


  낮에 아레나 경기장 앞에서 티켓을 들고 사진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광장에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었는데, 밤이 되니 베로나에 있었던 사람들이 다 여기로 모인 것처럼 사람들이 많아졌다. 밤 9시에 시작해서 거의 자정이 다 돼서야 끝나는 대장정이었기에, 밤에 열려 있는 슈퍼마켓을 물어물어 겨우 찾아 물과 간단한 간식을 구입해 아레나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정말 입이 떡 벌어졌다. 로마 콜로세움도 밖에서만 보고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었는데, 와 그 아쉬움을 한 방에 날릴 만큼 정말 시간을 거슬러 고대의 원형 경기장으로 입장한 느낌이었다. 중세 시대로 초대받았던 아씨시에 이어 이번 여행은 정말 시간까지도 함께 이동하는 건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언제 또 이런 공연을 보겠냐며 크게 마음먹고 거금을 들여 앞자리를 예매했었는데, 그 선택이 전혀 틀리지 않았음을 공연 시작 전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 조연 배우들과 오케스트라의 감동  

   

  우리가 볼 공연의 제목은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였다. 사실 오페라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다(Aida)’나 ‘카르멘(Carmen)’처럼 제목이라도 친숙한 오페라를 예매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탐방 일정상 베로나에 머물 수 있는 건 딱 하루였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일 트로바토레도 유명한 오페라지만 나에게는 영 낯선 작품이었는데, 무대 양쪽에 가사를 띄워주는 장치가 있어 그것의 도움을 받으며 결과적으로는 아주 재미있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놀라운 스케일의 무대 장치였다. 이제껏 봤던 어떤 공연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트가 화려했고 규모가 웅장했다. 세계에서 알아주는 오페라 축제인 만큼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도 수준급이어서 노래 가사의 내용을 잘 못 알아듣더라도 배우들의 감정선에 저절로 잘 몰입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무대의 절정은 여러 필의 ‘진짜 말’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공연에 맞게 잘 만들어진 으리으리한 무대에 압도당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살아 있는 말을 타고 배우들이 등장할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에 정말 깜짝 놀랐다. 그것도 연이어서 계속 등장하는 말을 보며, 현장감은 배가되었다. 어느 순간 무대에서 허구의 공연이 펼쳐지는 게 아니라, 그냥 지금 이 순간 베로나 아레나에서 내 눈앞의 사건이 진짜 일어나고 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현실과 가상 세계의 경계선이 허물어지는 느낌이랄까. 문학 수업에서 공연을 전제로 하는 극 갈래에 대해 가르칠 때 ‘현장감’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런 게 진짜 현장감이구나! 좋은 공연을 보다 보니 저절로 수업과 연결할 수 있는 배움도 함께 일어나고 있었다.


  이 작품은 4명의 주연 배우들이 중심이 돼서 이끌어가는 공연이라 노래와 감정 표현을 잘하는 주연들의 역량이 중요했고, 실제로 그들은 정말 훌륭해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공연 내내 계속 무대 끝자락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에 집중하며 무대 한쪽을 채우고 있는 조연들에게 눈길이 갔다. 일 트로바토레는 공연의 규모가 큰 만큼 정말 많은 배우들이 등장하는데, 유심히 보지 않으면 잘 드러나지 않는, 어쩌면 뒷좌석에서는 아예 보이지도 않을 수 있는 그곳에서 동작 하나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본연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그들은 진정한 프로였다. 그리고 베로나 밤하늘과 어울려 그들은 그 누구보다 내 눈에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주연의 독창을 들으면서도 눈은 순간순간 조연에게로 시선이 갔다. 나중에는 조연 배우들 몇몇이 나를 보면서 열창을 해주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우리는 아레나에서 교감하고 있었다.


  또 하나 시작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공연의 배경음악 전반을 담당하는 오케스트라였다. 무대 위에 올라 직접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않지만, 무대 아래에서 공연 전체를 지휘하고 조절하는 건 바로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연주를 하는 오케스트라였다. 운 좋게도 앞자리인 내 자리에서는 그들의 연주 실황을 엿볼 수 있었다. 조연 배우들만큼이나 멋진 공연의 배경이 되어 준 그들이 진심으로 멋있게 다가왔다. 


  별이 환하게 빛날 수 있는 건 까만 밤하늘이 별의 배경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주연배우들이 빛날 수 있는 것도 조연 배우들, 오케스트라 등 많은 이들이 멋진 배경이 되어 주기 때문이겠지. 새삼 각자의 자리에서 작든 크든 최선을 다하는 일이 얼마나 값진 일인가? 마음에 울림이 왔다. 그리고 어쩌면 진부한 결론이지만 나도 아이들이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며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묵묵히 내 자리에서 그들에게 ‘밤하늘’이 되어줘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오랜 시간 버킷리스트였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입단’을 위해 바이올린을 배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준비해봐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우천 시 최대 150분 웨이팅? 관객의 품격은 좋은 공연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공연과 상념이 어우러져 아레나의 관객 역할에 푹 빠져있을 때쯤, 구름이 몰려오며 중간중간 천둥과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아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상태기는 했는데, 오잉? 설마 비가 올까? 이거 야외 공연인데 비가 오면 어떻게 되는 거야? 아직 시간이 굉장히 많이 남았는데……. 비가 오는 상황은 나의 예상에는 전혀 없었던 선택지라 순간 이런저런 생각이 스쳤다. 그러던 중 비가 한 방울 떨어졌고, 오케스트라팀에서는 악기를 보호하기 위해 재빨리 악기를 철수했다. 그에 맞춰 당연히도 공연은 중단이 됐다. 어디서 나타나신 건지 우비를 파시는 분이 돌아다니셨고, 일단 우리는 얼떨결에 우비를 샀다. 비는 점점 거세졌다. 관객들은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는 경기장 내부로 비를 피했고, 우리도 그 행렬에 함께했으나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티켓을 구입하기 위해 내 평생 가장 비싼 거금을 공연에 쓴 건데 이렇게 공연이 중단되면 어떡하지? 걱정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평소 ‘빨리빨리’와는 거리가 먼 성격이지만, 그럼에도 나도 역시 빠름에 익숙한 한국인이었던 건지 이 상황이 초조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봤더니 우리만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편안하고 여유롭게, 조금의 동요도 없이 우아하게 대기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에게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는 웃으며 “최대 150분”까지 대기하며 기상 상황을 볼 거라는 답변을 해줬다.


  순간 내 귀를 의심해 재차 물었다. 150분? 150분이면 2시간 반이다. 2시간 반을 아무렇지 않게 다들 기다린다고? 대기하다가 자정이 넘어갈 것 같은데? 한밤중 공연 중단으로 환불 소동이 벌어져야 할 것 같은 이 상황에서 같이 온 지인들과 미소를 띤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옆에 있다 보니 나도 점차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 또한 공연의 일부고, 우리의 공연을 더욱 색다르고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특별한 추억인데 불과 몇 분 전까지 왜 이렇게 마음을 졸였을까? 생각이 드니 웃음이 나왔다. 야외에서 좋은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런 상황을 마주했을 때 대기, 최악의 경우에는 공연 취소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거고, 이미 그러한 문화가 뼛속까지 스며있는 그들에게는 이 대기가 너무나도 당연한 기다림처럼 보였다. 좋은 공연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에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관객들의 품격’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이 공연이 더욱 가치 있게 느껴졌다.


  우리에게 우천 시에만 알 수 있는 유럽인들의 문화를 잠시 체험하게 하려고 했던 걸까? 다행히도 20분 정도 지나 비가 그쳤고 무대를 정비한 후에 공연은 재개되었다. 지금도 공연이 끝난 후에 이 모든 감동을 안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의 그 공기가 생각난다. 배우들과 오케스트라, 관객들 그리고 자연까지……. 신이 빚어 놓은 것처럼 어느 것 하나 어긋남 없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뤘던 그날 밤의 그 느낌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어쩌면 ‘한여름 밤의 꿈’을 꿨던 게 아닐까? 꿈이었다면 깨고 싶지 않았던 그 꿈속으로 다시금 초대받아, 그때에는 오페라에 어울릴 만한 드레스코드와 좀 더 여유 있는 관객의 품격을 갖추고 꼭 다시 베로나 아레나를 찾을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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