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이 되던 해, 개명을 신청하였다.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던 이름 탓에 어릴 적 줄곧 놀림을 당했던 기억이 있었고 특정 종교를 따르진 않지만 줄곧 들어오던 사주에 관한 이야기가 내심 신경 쓰이기도 했었다.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나 자신에 스스로 변화를 일으키고 싶었다. 어릴 적 화가를 꿈꾸던, 대학 시절에는 사진작가를 꿈꾸던 나는 당시 최과장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남부럽지 않은 연봉과 직업을 얻고 아주 잠시 평안을 누리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갈증이 나를 조금씩 말라가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애초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무것도 없었다. 놀림을 당하던 이름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것도, 친구들이 캠퍼스 생활을 즐길 때 발 딛을 틈 없는 지옥철을 타고 출퇴근을 해야 했던 것도 모두 자의가 아니었다. 애초 출발선이 다르던 나는 뭐든 남들보다 몇 년씩은 늦었고 차츰 물질지상주의가 되어가고 있었다.
스물 셋, 우연히 본 영화 한편으로 사진이란 것에 빠져들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평소 영화광이었던 나는 당시 유명한 영화 잡지의 사진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회사를 관두고 사진과에 들어가기 위해 입시를 준비했다. 스물다섯이 되던 해였다. 누군가는 시작이라는 것을 하기에 조금은 늦었다고 무모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던 그런 나이였다. 그때도 지금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원하던 곳에는 가진 못했다.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다시 돈을 벌어야 했던 나는 또다시 꿈이라는 말을 접어버렸다. 그 말은 세상의 이치를 일찍 깨달았다 느낀 내게 사치였고 어쩌면 평생 내가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장에 차곡이 쌓여가는 잔고를 보며 안심했고 안주했다. 그러면서도 끝내 놓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책과 영화를 보며 가상의 세계를 활보했다. 가슴 속에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계속 자라게 두었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십대 중반, 모든 것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사랑도 삶도 어느 것 하나 온전히 내 것인 게 없었다. 개명을 한 후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인도로 떠나기로 했다. 평소 겁이 많던 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모험이라 여겼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주위에선 이런 나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는 듯 의아한 반응이었다. 약간의 질투와 부러움 섞인 잔소리도 들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또 다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아니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우여곡절 많았던 50일 간의 인도여행을 사진과 글로 기록했고, 책으로 출간했다. 책으로 탄생하기까지가 그리 쉽지 만은 않았다. 백 번 정도는 퇴짜 맞을 각오로 몇 몇 출판사에 투고를 시작했다. 그러다 안 되면 독립출판물로 제작할 생각도 했었다. 운이 좋게도 몇 몇 출판사에서 연락을 받았다. 사진을 전공한 덕분이었다. 인도의 강렬한 색감과 신비로운 풍경들을 담은 사진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8개월 정도의 시간을 들여 퇴고를 마쳤다.
부족한 글 실력이지만 사진 하나 믿고 과감히 도전한 첫 책이었다. 겨우 1세가 다 나가고 인세라는 것도 받았다. 내 사진과 이야기로 타인 앞에 서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고, 부족한 언변으로 강연도 나가게 되었다. 더 이상 사람들 앞에만 서면 얼굴이 홍당무가 되던 소녀도, 꿈을 잃고 몇 날 며칠 밤새 울던 소녀도 없었다.
사진을 시작한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사진은 나에게 물질에 대한 욕구를 태우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계속 꿈꿀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그 해방감과 용기로부터 에너지의 원천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생계를 위한 사진도 찍고 강의도 나가고 있다. 하지만 돈을 버는 데 쓰는 시간은 최소로 한다. 그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요즘은 주로 글 쓰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한다. 또 다른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것, 그것이 나의 새로운 꿈이다. 글 쓰는 법을 제대로 배워보지 못했기에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좋은 글을 많이 읽고 마음이 정갈해지도록 다스리기 위해 고군분투중이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한편 그리고 사진 한 장,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의 시작은. 그리고 그 순간들이 모여 또 다른 시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작에 마침표는 없다, 쉼표 그리고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