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은 나, 속인 그 -환상의 궁합

by 한걸음씩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지만 나는 가끔 남편의 휴대폰을 훔쳐봤다.

사생활에 대해 남편이 전혀 이야기 하지 않으니 무슨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다.

나에게 말해봤자 잔소리 들을게 뻔하니 그럴수도 있겠지만, 잔소리 들을 행동만 하고 다니니 나는 더 궁금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봤던 폰 내용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는 않았다.

그건 휴대폰을 훔쳐봤다고 자수 하는 것이고 그래서 만일 남편이 휴대폰에 잠금 설정이라도 하면 남편이 하고 다니는 것에 나는 깜깜이가 될테니까.


휴대폰 문자에는 일과 관련된 문자도 있지만 중간중간 여자들의 문자도 끼어 있었다.

-전화했었네요. 친척집에 와있어요.

남편이 먼저 전화했고 그녀는 떳떳하지 못하니 통화가 불편하다는 것 같은 느낌의 문자다.


-나한테 빌려간 건 두고라도 00언니한테 빌린건 빨리 갚는게 좋겠어요.

이건 아마 도박장 멤버의 문자인 것 같다.


-요새 왜 안오세요. 놀러오세요 00노래방

가지각색이다.


업무 관련을 빼면 대부분 여자들이 보낸 문자였다.

1년 동안 나를 속이며 두 집 살림을 했던 때를 생각하면 문자 정도는 상대적으로 건전한 편에 속한다.

불쾌하지만 만일 이걸 따지고 들면 남편은 적반하장으로 휴대폰 훔쳐본 일로 대노하며 본질을 흐릴 것이 뻔하니 덮고 넘어간다.

솔직히 여자가 보낸 문자라 화가 난다기보다 이렇게 밖에선 돈을 쓰고 다니면서 집에 쓰는 돈은 인색한데 대해 더 많이 화가 난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분노 버튼은 의외의 상황에서 작동하는 것 같다.


남편이 결혼 전부터 도박장에 다녔다는 것을 몇 년 전 시누이를 통해 들었는데 나는 1년 연애하면서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시누이가 알았다면 당연히 시부모님도 아셨을 텐데 그 분들도 그냥 방치해 두셨나 보다.

아니지, 결혼 전에 월급날만 되면 시아버님께서 돈을 갖다 드릴 때까지 계속 독촉전화를 하셨다는 걸 보면 아버님은 아셨던 것 같다.


내가 결혼 전에 알았다 해도 도박중독의 심각성에 대해 무지했기에 개의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집안에 도박을 하는 사람이 없으니 집문서까지 내다 주는 드라마 속의 남자들처럼 해야 도박중독인 줄 알았다.

게다가 남편과 나는 롱디여서 주로 전화로 통화하고 만나는 건 한달에 두어번이 전부였다.


결혼 초반에 도박에 빠져 외박 하는 것이 싫어서 차라리 집에서 하라며 방 하나를 내주고 도박꾼들 밥까지 해 주던 때도 있었으니 바보 천치가 따로 없다.

그때는 연년생 아기들이 기어 다닐 때였는데 화투를 갖고 흉내 내며 노는 걸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었다.

그 후로 도박꾼들은 오지 않았으나, 남편의 외박은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한편으로는 남편이 밉다.

나야 몰라서 그랬다 쳐도 자기는 도박방이 어떤 건지 알았을 텐데 집에서 하란다고 도박꾼들을 불러들인 것이

지금 생각해도 원망스럽다.

내가 그렇게 말했어도 그건 아니라며 거절했어야 맞는게 아닌가.

적어도 남편이고 아빠라면...

나와 남편은 여러모로 함량미달의 부모였다.



남편의 내로남불은 도박에 대한 문제에서 절정을 드러냈다.

-나는 여자가 노름하거나 신용불량자면 절대 같이 안살아.


정말 어이없는 말이다.

자기가 노름 중독이고 신용불량자인데 그런 사람과 절대 같이 안산다는 말을 하는게 모순중에 모순이다.

말하면서 낯 부끄럽지 않나?

아마도 도박 멤버에 속한 여자들이 신용불량자가 많았나보다.

남편은 그런 여자들과 빗대어 '너처럼 착한 여자는 없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말로만 할게 아니라 깨달은대로 뭔가 좀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 주었더라면 좋으련만.


남편은 도박때문에 카드대출 받으려다가 보이스피싱에 연루되어 사기 당하고, 그 일로 신용불량자가 됐다.

정말 누구에게 말하기도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유는 남편이 자신의 중독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중독이냐?

나는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안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대부분의 중독자들이 그렇다고 한다.

그리고 핑계를 꼭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


하루하루 넘기다보니 어느덧 결혼 35주년.

그동안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기 삶을 살았던 남편은 몸은 더 자유로와졌으나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노후가 걱정된다던 남편이 과연 노후 생각은 하며 사는걸까.

나야 물론 남편과 재결합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남편은 전혀 모른채 서류정리만 남겨둔 별거로 알고 있을 것이다.

중독이 끊어지지 않으면 남편을 부르지 않겠지만 남편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고 있다.

술. 담배. 도박의 중독이 끊어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함께 믿음의 가정 만들어 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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