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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의 두 얼굴

by 한걸음씩

남편과의 별거가 나에게 해방일지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까지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언젠가는 남편과 재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남편에게 믿음이 생겨 술, 담배, 도박의 중독이 끊어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며 기도 노트를 한쪽씩 써 나갔다.

그러다 보니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남편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자유부인이라고 룰루랄라 지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나야말로 내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변함없는 루틴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려 애썼다.

남편이 집을 나간 때는 여름휴가가 한창이었으나 남편 쫓아낸(?) 죄책감 같은 것이 있어서인지 나는 휴가를 즐기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집이 편하고 좋으니 출근 안 하고 집에만 있어도 나에게는 휴가나 마찬가지였다.


해마다 딸과 여름휴가를 보냈는데 올해는 내가 가지 않으니 딸은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계획했다.

평소에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서워서 혼자 잠도 못 자고 샤워도 욕실 문을 열어놓고 하는 나를 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엄마, 이모 오라고 해서 집에서 같이 자.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내가 애기냐? 걱정 말고 잘 놀다 와.


호기롭게 대답했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3일 동안 나 정말 혼자 지낼 수 있을까?

혼자 자면 가위눌릴 텐데... 누구라도 불러서 같이 자야 하는 걸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딸이 영원히 내 곁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 이번 기회에 독립하는 연습 좀 해보자고 생각했다.


딸이 떠난 첫날.

남편이 집을 나갔을 때와는 다른 해방감을 느꼈다.

식사 준비를 위한 일도 할 필요가 없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날아오를 것 같았다.

퇴근 후 옷을 갈아입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들었다.

한두 시간이 지난 후 어슬렁 거리며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고 냉장고 맨 위부터 스캔하다가 과일을 꺼냈다.

몇 조각 입에 물고 묵은지를 꺼내 잘게 썰어 프라이팬에 넣고 볶았다.

냉동실에 얼려놓은 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해동시키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나를 위해서도 요리를 하는구나. 굶어 죽진 않겠네.


혼자 먹는 김치볶음밥은 딸과 먹을 때보다 맛은 없었다.

성의 없이 만들었으니 맛이 덜한 건 당연하겠지.

밥맛이야 좀 없으면 어떤가.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는 게 이렇게 좋은데 말이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30시간쯤 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슬로 모션으로 움직였다.

휴가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느리게 가는 시간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우려와 달리 '나 홀로 집에'서 보내는 2박 3일은 무섭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짧아 아쉬웠다.

여행을 마치고 온 딸은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외롭지 않았냐고 자꾸 물어봐서 나중엔 허전해 죽는 줄 알았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혼자 사는 삶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별거 두 달 후.

기나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됐다.

직장인에게 연휴는 꿀맛일 테지만 지금까지 나는 오히려 출근이 더 낫다 싶을 정도로 집이 싫었다.

쉬는 날이면 남편은 밤에 나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들어와 하루 종일 TV 앞에 누워 자다가 끼니때가 되면 라면이나 찌개를 끓여 먹느라 잔뜩 어질러 놓고 치우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외출하는 게 나아서 어떻게든 약속을 만들어서 나갔다.


이번 연휴는 다르다.

남편이 없다.

나는 이미 흥분되어 연휴를 어떻게 보낼까, 무슨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을까 생각하느라 이미 연휴 텐션이었다.

이렇게 즐겨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은 내가 즐거운 만큼 남편은 외롭고 힘든 연휴를 보낼 것 같아 마음 무거웠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을 오라고 할 생각은 0.000001%도 없다.

오라고 하면 남편은 잘됐다 싶어 바로 눌러앉을 테고, 우리 집은 다시 예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바늘틈만한 가능성도 열어두면 안 된다는 것이 나와 딸의 생각이기도 하고 상담사의 권면이기도 하다.

남편 역시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에 나에게 전화한다던가, 집에 오는 일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 연휴는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게 됐다.


딸은 연휴 때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다.

휴일이면 나무늘보처럼 거실에 늘어져있는 남편 때문에 나도 딸도 누구를 초대한다는 건 상상도 안했는데 이번에 딸이 숙원 사업처럼 여기던 일을 한 것이다.

물론 식사준비는 오롯이 내 몫이었지만 집밥을 제대로 못 먹던 친구들이라 꼭 한번 해주고 싶었기에 스트레스는 없었다.

해 먹이는 거 좋아하는 나의 특기를 발휘할 기회였으므로 즐겁게 요리를 했다.


연휴 중 하루는 언니네 가족들과 만나 카페에서 차도 마셨다.

집으로 오라고 할까 했는데 편하게 쉬고 있던 딸이 원하지 않아서 밖에서 만났다.

남편과의 별거를 아무렇지 않게 언니 가족에게 이야기했고, 이미 남편에 대해 다 알고 있는터라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한동안 보지 못한 친구와의 만남도 있었다.

뭐 하며 연휴를 보낼까 했던 생각은 온 데 간데없고 휴일이 짧다고 여길 정도로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명절음식 하나고 만들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놀며 지내다 보니 연휴는 시작하자마자 끝난 듯 아쉬웠다.

그래도 좋았다.

신경 써야 할 일이 없는 명절은 행복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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