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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남편 없는 세상

by 한걸음씩

부부 사이가 안 좋으면 자식과 지나치게 밀착된다고 한다.

남편에 대한 믿음도 없고, 대화도 안 통하고, 공유할만한 게 점점 없어지니 나는 남편 자리에 딸을 앉혀 놓았다.

딸과 가까워질수록 남편은 나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갔고, 남편과 나누어야 할 모든 것들은 자연스럽게 딸의 몫이 되었다.

여행, 나들이, 산책, 운동, 식사뿐 아니라 직장이나 모임에서 생긴 사소한 에피소드나 스트레스까지 남편 아닌 딸과 이야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남편에게 하소연하기라도 하면 남편은 듣기 귀찮은 듯이 일언지하에 잘라버렸다.

-야, 때려치워. 뭐 하러 다니냐.


가끔 외식을 하자고 하면 차라리 집에서 라면을 먹는 게 낫다고 김새는 소릴 하고, 어쩌다 함께 나가서 외식할 때면 만취될 때까지 술을 마셨다.

그 모습이 싫어도 맨 정신에 이야기하는 게 어색하니 그럴 거라고 이해하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을 위해서라기보다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남편과는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없어졌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침묵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반면 남편은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졌는데, 말의 대부분은 정말 아무 의미도 없었다.

질문 폭격기가 되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질문을 하니 귀찮기 짝이 없었다.

-이거 뭐야? 어디서 났어? 무슨 반찬 만드는 거야? 뭐 먹고 있는 거야?


말 배우기를 시작해서 한찬 호기심이 많은 세 살 어린아이처럼 '뭐야 뭐야'병이 걸려서 끝도 없이 질문을 해대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긴 뭐야? 쪽파잖아. 쪽파 몰라? 마트에서 샀지 어디서 났겠어.


나중에는 생활소음이라 생각하며 답을 안 하다가 질문 받기 귀찮아서 아예 눈을 안 마주쳤다.

남편은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대화가 너무 없다며 투덜거렸지만 정작 진지한 대화를 하려고 하면 자리를 피하는 사람이 남편이었다.

-시끄러. 그런얘기 하지마.

대화가 뭔줄 모르는 사람 같다.


남편과 대화하는 유일한 주제는 생활비였다.

월급을 통장째 맡기는 부부도 있고, 생활비 통장으로 각자 일정금액을 입금하며 사는 부부도 있으나 나는 남편에게 매번 달라고 졸라야 했다.

날짜를 약속해 놓고도 내가 말하지 않으면 은근슬쩍 넘어가는 게 다반사일 뿐 아니라 약속을 한 번에 지킨 적도 별로 없다.

이런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그러다 결국 한 달을 그냥 넘기기도 했다.

약속 안 지킨 건 생각 안 하고 돈 얘기 좀 그만 하라며 짜증 낼 때는 자존심이 상하고 치사했다.

애들 용돈 주듯 한 달에 몇십만 원 주는 남편의 돈이 없어도 그만이었지만, 번 돈을 도박장과 술값으로 다 쓰고 집에서 편승하듯 지내는 모습이 너무 미워서 그렇게라도 자기 몫을 해야 내가 억울하지 않았다.


만일 자식이 그랬다면 잘못 키운 내 탓이고, 자식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데리고 살았겠지만 남편은 다르다.

결혼생활은 부부가 함께 공동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지 나 혼자 책임지는 기형적인 가정에 더 이상 나를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남편도 혹시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혼이 아닌 별거를 선택했다.

이혼 후에 도박이 끊어진 사례도 있다는 말에 희망을 걸었다.


딸과 둘이 남겨진 집은 말 그대로 '홈 스위트 홈'이었다.

처음에는 둘의 생활이 익숙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남편이 있던 때 그대로 유지하며 살았다.

남편이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인데 정신을 차리고 나서 거실 가구배치를 완전히 뒤집었다.


가장 먼저 남편이 애장품처럼 끼고 살던 TV를 먼저 치웠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다.

블라인드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이 들어오고, 책장 앞에 있는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며 책장을 넘기는 여유 있는 모습은 나의 로망이기도 했다.

거실 한가운데에 식탁을 옮겨놓고 예쁜 테이블보를 씌워 놓으니 불을 켜 놓아도 칙칙했던 거실 분위기는 잡지책에 나오는 사진처럼 예뻐 보였다.

남편 한 사람 나간 것일 뿐인데 집안의 공기까지 달라진 것 같은 이 상황을 뭐라고 해석해야 할까.


현관 번호키를 누르는 환청을 들을 때도 몇 번 있긴 했지만, 남편이 제 발로 들어올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홈 스위트 홈을 마음껏 누렸다.

집이란 게 이런 거구나.

나가면 들어오고 싶고, 일단 들어오면 몸도 마음도 편안해지는 거구나.

딸과 나는 다이어트 식단도 마음껏 하고, 가끔은 배달 음식을 먹기도 하며 매 순간에 행복을 느꼈다.

물리적 폭력은 없었지만 남편의 존재 자체가 그동안 얼마나 가정을 짓누르고 숨통을 조였는지 그가 없음으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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