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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걸음씩 Mar 15. 2024

내가 엄마라 미안해

[부모는 선택을 할 수 없으니....]

내가 '돈 잘 쓰는 남자'를 만나서 풍요를 누린 것은 고작 2년 남짓이다.

월세를 밀려서 깎인 보증금으로 방을 구하러 다니는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다.

연애를 할 때는 남편의 외모 때문에 남들 눈에 띄기 싫었다면 이제는 단돈 몇백만 원을 들고 반지하방 월세를 구하러 다니는 내 모습이 들킬까 봐 두려웠다.

이런 집에도 사람이 사는가 싶을 정도의 집 몇 개를 보고 나니 더 이상 다니기도 싫었다.

꾸며놓으면 그나마 괜찮을 것 같은 반지하집 하나를 계약했다.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 있는 게 수상하긴 했지만 입주를 빨리 할 수 있으니 마음에 들었다.

2층에 사는 주인은 짐정리를 하고 있는 우리 집에 가끔씩 와서 들여다보고 올라갔다.

감시하는 거야 뭐야?

기분 나쁘게...


반지하로 얻은 집은 생각보다 문제가 많았다.

계단 밑에 만든 화장실은 천정이 비스듬해서 키가 작은 나도 안쪽에 들어가면 일어서기 힘들었고 그나마도 어디선지 작은 벌레가 계속 나왔다.

락스며 욕실 세정제를 사용해서 아무리 청소를 해도 소용없었다.

며칠이 지나니 방에선 개미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특히 저녁에는 잠자던 아이들이 개미에 물려 경기를 하듯 울면서 깨는 일이 종종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정말 미안해.....'


빨리 돈을 모아서 이사 가면 된다 생각하고 개미 퇴치용 패치도 붙여보고 모서리마다 테이프를 붙여서 개미가 나올만한 구멍을 죄다 봉쇄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치명적 결함이 있었다.

이런 건 처음 계약할 때 고지를 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정화조가 주방바닥에 있었던 것이다.

1년에 한 번 있는 정화조 청소를 하겠다며 열쇠를 맡기고 가라는 주인 말이 의아해 물었더니 우리 집 주방 바닥에 정화조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집을 짓는 인간들은 뇌가 어떻게 돼먹은 걸까?


주방 장판을 걷어내고 정화조 청소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

직업이 자유로우니 그 시간에 와서 내가 참견을 해도 되었지만 일부러 집에 오지 않았다.

그걸 보면 그때부터 집에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을 것 같아서였다.


조금씩 남편이 무시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남편의 돈을 보고 결혼했는데 그 돈이 없어졌으니 남편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할 상황이다.

게다가 나의 마징가제트였던 남편은 온데간데없고, 알콜릭에 노름을 즐기며 생활비도 제대로 주지 않는 남자라니...

'쪽팔리다'는 단어도 민망해서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정도로 순진했던 나는 조금씩 입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노가다 일을 하면서 욕이 자연스러웠던 남편과 살면서도 한 번도 욕을 한 적이 없었는데 내 입에서도 너무 자연스럽게 육두문자가 나오는 걸 보고 나도 놀랐다.

아이들만 없었더라면 이혼을 열두 번도 더 했을 터이지만 연년생 두 아이를 데리고 이혼녀로 사는 것은 죽는 것만큼이나 선택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나 혼자만 아등바등 열심히 사는 것 같아 억울했다.

마치 돈 버는 마누라 믿고 자기 멋대로 사는 주정뱅이 남편을 데리고 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편은 남편대로 괴로웠으리라.

남편과 동업을 했던 친구 말을 빌리자면

"제수씨. 00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이번에 나랑 일하고 제대로 안되니까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원래 재수가 없는 놈이라 뭘 해도 망하니까 자기랑 어울리지 말라고요. 이번일도 자기랑 안 했으면 망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는데... 마음이 쫌 그렇더라고요."


미우면 그냥 밉기만 할 일이지 왜 불쌍하고 그러니....


그러나 나의 속내를 남편에게 표시 내지는 않았다.

얼굴을 안 볼 때는 측은하고 불쌍해도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 감정은 온데간데없고 밉기부터 했다.

남편이 주눅이 들어있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미안해'로 도배를 했더라면 측은지심을 느꼈겠지만 남편은 항상 개선장군처럼 당당했고 나는 그 모습에 더 화가 났다.

우리 부부야 우리의 욕심과 잘못으로 이런 일을 겪는 것이니까 할 말이 없지만 아이들이 무슨 죄인가.

무능력한 부모 만나서 개미와 벌레가 들끓어서 잠도 푹 못 자는 집에서 살게 해 놓고 뭐가 저렇게 당당할까.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질수록 남편에 대한 원망과 무시도 날이 갈수록 더했다.


그 집에선 2년 만기를 채우지 못하고 이사했다.

이사하겠다고 하니 집주인은 '기한전이니 복비도 직접 내고 방도 직접 빼서 나가라'라고 했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집에서 세를 받으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양심이 없는데 내가 뭘 바라겠는가.

아, 깜빡 잊은 게 있다.

그 집에서 있었던 또 하나의 큰 사건.

어느 날 갑자기 벽에 있던 주방 싱크대 찬장이 떨어져 난장판이 된 적이 있다.

워낙 주방 바닥이 좁으니 싱크대 찬장이 주방 바닥을 다 덮었다.

안에 있던 그릇들도 다 깨지고 지진을 방불케 하는 모습을 보고 심란했다.

다행히 아이들과 나는 방에 있었을 때라 다치지는 않았는데 굉음에 얼마나 놀랐던지...

그 현장을 보고도 주인은

"집이 오래돼서 그랬나 보네"라며 너무 태연자약했다.

멍청한 세입자 만난 거 복인줄이나 아셔~

정신적 피해보상 어쩌고 하면서 골치 아프게 구는 사람도 있다는 걸 좀 알아야 할 텐데 말이다.


그나저나....

험한 집구경을 또 해야 하는 건가...

방 보러 다니는 거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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