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달콤한 유혹. 신용카드]
부동산 중개소에 가서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방을 구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수치스러웠다.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길래 돈이 그것밖에 없냐고 속으로 흉을 볼 것 같았다.
요즘은 직방이니 뭐니 해서 부동산 직거래 앱도 많이 생겼지만 그때는 벼룩시장이나 교차로 같은 정보지가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우선 내 보증금에 맞는 방을 몇 개 찾아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려놨다.
그러고 나서 위치를 확인했다.
살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이 있었다.
보증금은 가진돈으로 가능했지만 월세는 더 부담을 해야 하는 집이라서 망설여졌다.
그러나 지하라고 해도 '계단 없음'이라는 설명을 달아 놓은 것을 보니 여기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계단 없는 반지하 집은 생각보다 쾌적했다.
"혹시 정화조가 어디 있나요?"
좀 엉뚱한 질문을 첫 번째로 던진 나를 보며 잠깐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현관 앞 큰 고무판을 가리켰다.
무심코 지나쳤는데 현관 앞에는 두꺼운 검은색 고무판이 있었다.
정화조 냄새가 올라올까 봐 덮어 놓은 것 같았다.
그래. 이 정도쯤이야. 집 안에 없는 게 어디야.
그 집에 살면서 이웃과 쌓은 추억을 생각하면 파란 잔디에 누워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휘날리는 벚꽃을 보는 것처럼 코끝이 간질간질해진다.
바로 앞집 2층엔 아들 또래 남자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있었는데 지금도 언니 동생하며 지내는 인연이 되었다.
나중엔 그 집 아들 빈이와 같은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차량 픽업시간까지 챙겨주니 그렇게 고마울 데가 없었다.
내가 늦는 날이면 빈이엄마는 내 아들을 챙겨서 밥도 먹이고, 더운 여름날엔 옥상에서 물을 받아놓고 물놀이도 시켜줬다.
고맙다, 미안하다 말하는 나에게 어차피 자기 아들이랑 놀아서 자긴 해준 게 없다고 말하는 착한 동생이다.
빈이네 지하엔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가 남편과 둘이 살았는데 오랜 난임으로 아이를 포기했다고 했다.
그 집은 우리 집과 달리 '계단 많음'인 지하라 골목에서 보면 창문으로 그 집 내부가 다 보였다.
어둑한 곳에서 항상 재봉틀로 뭔가를 열심히 박고 있는 그녀.
좀 친해지고 나서 물으니 남편이 병약해서 돈을 제대로 못 버니 자기가 부업을 하는 거라고 했다.
남편이 병약하지 않았어도 혼자 있기 심심하니 그 좋은 기술을 묵혀두진 않았을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남편과 이혼했고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렸다.
인정 많은 빈이 엄마의 끈질긴 노력으로 다시 만났고 서로 다른 곳에 살면서도 꾸준했던 우리 셋의 재미난 에피소드는 기회가 되면 따로 풀어놓기로 한다.
그 집에 살면서 남편은 지방 출장이 잦았다.
지방에서 공사를 한다며 내려가서 한 달 정도 머물고 오는 일을 거의 1년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형편이 나아지지는 않았고, 그때 나는 신용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신용카드사에서 경쟁이라도 하듯 마트, 길거리, 사무실 방문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판촉활동을 했다.
나는 가능한 대로 계속 카드를 만들었다.
7~8개 정도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시작된 돌려 막기.
나는 카드 한도가 마치 내 통장의 잔고처럼 여겨졌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사주지 못했던 것도 사주고, 내 옷도 샀다.
그래봤자 값비싼 옷은 손 떨려서 사지도 못하고 기껏해야 고작 몇만 원짜리였음에도 빚이 늘어나는 속도는 내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월세는 현금서비스를 받아서 해결했고, 카드대금은 카드론을 받아서 갚았다.
'돈 벌어서 갚으면 되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나를 안심시켰고, 언젠가는 돈을 많이 벌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고문도 카드사용을 부추겼다.
나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서 터진 2002년 카드대란.
신용불량자라는 말도 그때 처음 사용되지 않았을까?
급물살을 탄 것처럼 카드 빚을 감당 못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도 그 안에 섞여 있었다.
'생계형 신용불량자'라는 말보다 차라리 보증을 잘못 서서 신불자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한 이유는 내가 가난하다는 것이 너무 싫고 수치스러웠다.
하루에도 몇 통씩 카드사의 독촉 전화를 받아야 했고, 보험 영업을 하면서 그런 전화를 받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보험을 한지는 10년이 되어가지만 난 영업능력이 없는지 여전히 수입이 많지 않았다.
카드사 채권단에서 갚을 수 있는 날짜를 말하라는데 돈이 들어올 구멍이 있어야 말을 하지...
몇 번 약속을 어기니 이제 집으로까지 찾아왔다.
피를 말리는 것 같았다.
세상 어디도 마음 편하게 있을 곳이 없었다.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나의 이런 상황이 노출되었고, 그 모습을 본 아이들도 늘 불안해했다.
'누가 내 빚 갚아서 제로 상태로만 해주면 정말 굳게 결심하고 새 출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몇천만 원의 빚을 누가 갚아 주겠는가.
남편에게 말했더니 오히려 잔소리와 핀잔만 주었고 의욕상실되니까 빚얘기 하지 말라며 냉담했다.
돈 많은 동생에게도, 아들 수술 때 미리 알아서 병원비를 챙겨주던 친구도, 그때는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거절하거나 돈이 없거나 했다.
이런 경우를 사방이 막혔다고 하지.
외로웠다.
죽고만 싶었다.
어두운 방에 팔과 다리 힘을 빼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불도 켜지 않은 방은 창밖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빛으로 가구의 형태만 어렴풋이 보였다.
가만... 애들이 어딨지? 아... 자고 있지.
남편도 없고...
내가 만일 죽으면...
죽는 방법을 생각했다.
문고리에 끈을 걸고.... 그걸 뒤로 빼서......
그러다 문득 아이들이 떠올랐다.
내 죽은 모습을 아이들이 본다면 평생 지울 수 없는 악몽이 될 것이고, 생활력도 자식사랑도 없는 남편은 아이들을 버릴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도 안 나는데 오직 두 아이들만 생각났다.
내가 그때 술에 취해 있었더라면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낭만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극단적인 상황에서 내가 부양해야 할 두 아이가 짐이 아니라 힘이 되었다.
나만 바라보고 있는 내 아이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없던 힘이나 의욕이 생기진 않았다.
'될 대로 돼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포기가 됐다.
값도 안 나가는 가재도구에 빨간딱지가 붙어도 어쩔 수 없지.
나를 감옥에다 집어 쳐 넣던지 마음대로 하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