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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걸음씩 Mar 22. 2024

'부모'라는 DNA

[아버님은 그것조차 물려주지 않으셨나 보다]

남편과의 관계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아이들 이야기가 별로 없다.

우리의 부부관계가 아이들로 인해 좌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나는 아이들을 대하는 남편의 태도가 많이 못마땅했다.

남편을 보면서 부모님들이 왜 결혼할 때 배우자의 부모를 보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시어머니가 둘째 출산 때 산후조리를 해주시느라 한 달가량 집에 함께 계셨는데 그때 어머니의 결혼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부모끼리만 의견이 맞으면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했던 그 당시 어머니가 시집을 오니 시아버님이 천식이 있다고 하여 농사일도 거들지 않고 집에서 무위도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보시기엔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았는데 집안에서는 호호 불어가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니 그 일은 오롯이 어머니 몫이 되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아버님은 군대에 가시고 어머니 혼자 시집살이를 하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고 고향 생각에 많이 울면서 마음을 달랬다고 하셨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된 것 같다.

그 연민 때문인지 지금도 시어머니에 대해 반감이 별로 없다. 

아니 근데, 아버님은 군대에 가실 정도의 건강이라면 일상생활도 가능한 거 아닌가?

아무튼 아버님은 '천식환자'라는 도피처에서 놀고먹는 게 몸에 익숙한 사람이고 가장을 대신해서 어머니와 장남인 남편이 집안일을 도맡았단다.

남편을 통해 들었던 시아버님 이야기는 걸핏하면 매를 때려서 일부러 밖에서 놀다가 다들 잠든 시간에 집에 들어가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부다.

남편은 그때 결심했다고 한다.

'나는 나중에 절대 내 아이들에게는 손대지 않겠다'라고.

실제로 남편은 한 번도 아이들을 때리지 않았다.

체벌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크다 보니 때리지 않은 것 하나만으로도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식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배워본 적도 없으니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 턱이 있나.

기저귀 한번 갈아준 적이 없는 남편. MZ가 아닌 걸 천만다행으로 알아야 한다.


아들은 아기 때부터 병치레가 많았다.

폐렴과 장염을 달고 살아서 좀 과장하자면 1년에 두세 번은 입원을 했다.

연년생인 딸도 낯을 가리니 누구에게 맡기기가 어려워서 입원하는 동안 데리고 있었는데 딸도 면역이 약해져서 입원하게 되는 악순환이 있기도 했다.


아들이 벽을 잡고 조금씩 일어서기 시작한 7~8개월쯤 일이다.

놀다가 한 번씩 얼굴을 찡그리며 울어서 어디가 아픈가 했는데 갑자기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저귀를 보니 변 색깔이 수상하다.

기저귀에 묻은 변의 가장자리로 약간 핏빛이 번진 것처럼 보였다.

그 길로 기저귀를 들고 병원에 갔더니 장이 꼬이는 장중첩증이라고 했다.


"잘 들으세요. 

약물을 투입해서 꼬인 장을 풀어야 하는데 만일 실패하면 수술을 해야 됩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잘 잡고 계셔야 해요."


치료 과정은 그랬다.

일단 관장을 한 후 항문을 통해 약물을 투입해서 꼬인 장을 푸는 것이다.

글로 쓰니 간단하게 한 줄 밖에 안 되는 이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관장약을 넣고 약이 새지 않게 몇 분 간 아이 항문을 막고 있으라는데 변의를 느끼며 복통이 오는지 아기는 몸을 뒤틀며 울어댔다.

나도 관장을 해 봤지만 그 고통은 정말 말로 하기 힘들다.

항문을 누르고 있는 내 손이 버티기 힘들 정도의 압력 때문에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빠졌다.

그 순간 뿜어져 나오는 액체가 화장실 바닥에 뿌려졌다.


'이걸 아기가 어떻게 참아...'


그러나 진짜 힘든 건 그다음이다.

차가운 침대에 발가벗긴 아기를 눕히자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의사는 나를 아기의 머리 쪽에 서게 하고 팔과 어깨를 움직이지 못하게 침대에 눌러서 잡고 있으라고 했다.

주사기를 통해 항문으로 약물을 투입하기 시작하자 아기는 정말 목이 터질 것처럼 울고 온몸을 비틀어댔다.


" 엄마 꽉 잡으세요. 놓치면 수술해야 돼요!!!"


의사는 소리를 지르면서 나를 쏘아봤다.

죽어라고 악을 쓰며 우는 아기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수술'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맴돌면서 나도 열린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흘리며 죽을힘을 다해 아기를 잡아 눌렀다.

초음파인 것 같은 촬영장면이 모니터로 생중계되듯 보였는데 비엔나소시지처럼 꼬인 아기의 장이 하나씩 탁, 탁 풀리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아기의 힘은 더 세졌다.

돌도 안된 그 작은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무사히 약물 치료를 마치고 아기를 안고 나오는데 너무 긴장하고 힘을 준 탓인지 어깨부터 손목까지 심한 통증이 느껴지고 힘이 없었다.

이런 모든 일련의 과정을 겪을 때 남편이 함께 했던 기억이 없다.


남편은 그랬다.

지방에 출장중일 때도 내가 보고 싶다며 전화를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애들은 안 보고 싶어?"라고 물어보면 

"난 애들은 안 보고 싶더라"라고 말을 해서 정말 이해가 안 갔었다.

내가 죽고 못 사는 연애로 결혼했더라면 그 말도 좋게 들렸겠지만 솔직히 그때는 '보고 싶다'는 그 말이 '하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실제로 아이의 입원이 길어졌을 때 병원에 와서 그 문제로 불평을 하던 때도 있었으니까.

그때는 정말 이게 인간인가 싶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몽둥이가 있었다면 정신 차리라며 흠씬 두들펴 패주고 싶었다.

그래도 그때는 악처가 되기 전이라 살살 달래서 돌려보냈다.


부성애 결핍의 클라이맥스는 아들이 신장병으로 수술하게 된 초등학교 1학년 때다.

일주일정도 입원을 하고 퇴원일이 되었는데 남편이 연락이 안 됐다.

전화기도 꺼져 있고...

분명히 퇴원일을 알려 줬는데 작정을 하고 잠수를 탄 것이다.

예상을 전혀 못한 것은 아니다. 

남편은 자기 힘으로 안된다 싶으면 해결책으로 '잠수'라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면 결국 내가 동분서주하며 해결을 했고...

이런 일이 종종 있다 보니 나도 남편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항상 내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했고 그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남편은 더 무책임 해졌다.

남편이 무책임해서 내가 나서게 된 건지, 내가 나서니까 남편이 손을 떼게 된 건지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따지는 것처럼 의미 없는 일이다.


이제 내가 남편을 무시하는 것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닌 그의 인간성까지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눈에 안 보이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퇴원 후 며칠 동안 외박을 하고 온 남편에게 짐을 싸서 나가라고 했다.

남편은 짐도 싸지 않고 그 길로 나갔다.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경고다.

나와 다투고 나면 종종 집을 나갔고, 남편이 나가고 나면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되어 항상 내가 먼저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했고 남편은 마지못해 들어와 주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러나 이번은 문제가 다르다.

아들의 수술비를 모른 척 한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일주일 내내 병원에만 있던 나에게 모든 문제를 미루어 놓고 자기는 잠수를 타?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무심하게 한 행동이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돈 필요하지?"라며 미리 병원비를 챙겨 온 친구가 남편보다 백배 천배 나았다.


나는 집을 나간 남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연락을 하겠지라며 남편이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의 행동이 나에게 너무 깊은 생채기를 냈다.


예상치 못한 우리의 별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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