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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걸음씩 Mar 20. 2024

주홍글씨

[나는 신용불량자]

내가 신용불량자로 지냈던 기간은 정확하게 10년이다.

카드대란 이후 신용불량자를 구제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신용회복위원회를 발족했다.

국가가 보증하고 개인은 카드빚을 몇 년에 나누어 상환하는 방식인데 상환이 끝나면 신용이 회복될 뿐 아니라 상환을 성실하게 한 사람에게는 신용점수도 주어졌다.

채무자가 최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제외한 수입의 대부분을 상환에 집중할 수 있게 설계를 해 주어서 나는 3년 동안 그 빚을 갚게 되었다.

그러나 금융권만이 아닌 개인적인 빚도 있었기 때문에 위원회의 상환액이 연체되기도 하고 그때마다 유예도 여러 번 하다 보니 그 빚을 다 갚는데 10년이 걸렸다.



10년 동안 현금으로만 거래를 하며 사는 생활은 마치 신분증 없이 숨어 사는 불법 체류자 같았다.

장을 보거나 마트에서 식료품을 사는 것은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는데 교통카드 충전이 가장 불편했다.

갖고 있던 경차는 팔아치운지 오래고,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만원씩 충전했다.

충전하던 편의점주는 '이거 얼마 남지도 않는 건데...'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면서 귀찮아했고, 어떤 날은 기기가 고장 났다며 해주지 않은 적도 있었다.

모든 게 돈이 없으면 당해야 하는 불이익이라고 여기며 카드를 무분별하게 쓴 잘못의 대가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 10년의 훈련은 혹독하리만치 슬프고 외롭고 괴로웠다.


내가 학창 시절 내내 등록금이 밀려서 너무 힘들었기에 나중에 내 아이들에게 학비만은 절대 밀리지 않게 하겠다며 다짐했었지만 딸아이 학교까지 불려 가는 창피를 당해야 했다.

차라리 한부모 가정이었더라면 도움이라도 받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남편의 존재 자체가 우리 가족을 가해하고 있다며 미워한 적도 많았다.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없으니 월세를 내지 못해 그나마 있던 보증금까지 까먹고...

쫓겨나듯 이사했던 집은 방과 (주방이 아닌) 부엌이 있는 집이었는데 부엌에 있는 보일러 기계 밑에서는 쥐가 구멍을 뚫고 들락 거렸다.

쥐 잡기용 끈끈이를 놓았을 때 서너 마리가 붙어서 기절할 듯 놀란적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땐 정말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카드가 아닌 현금으로 장을 보니 장점도 있었다.

돈으로 보이는 현금이 나가니까 현타가 제대로 왔다.

만 원짜리 하나 쓰는 것도 망설여지니 무엇을 사든지 몇 번씩 고민하고, 가성비도 따져보게 되고 과소비와는 저절로 멀어졌다.

말이 10년이지,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시작해서 대학생이 되어서까지였다.

가스가 끊긴 적도 있었는데 어느 날엔 퇴근한 나에게 초등학생이었던 딸이

"엄마, 나 오늘 가스 연결된 줄 알았잖아. 

친구랑 집에 왔는데 집이 너무 따뜻하게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얼른 방에 들어와서 봤는데 점검에 불이 들어와 있어서 아직 연결 안 된 거 알았다니까 ㅎㅎㅎ"


딸은 깔깔대고 웃었지만 나는 눈물 없이 울었다.

가슴으로 운다는 게 이런 건가보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환상을 느낀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휴대용 버너로 밥도 해 먹고, 물도 데워서 씻고...

그때 남편은 일이 없다며 집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라면값 좀 주고 가라며 짜증 내는 모습이 죽이고 싶게 미웠다.

"이 정도면 아파트 경비를 하든 대리운전을 하든 해야 하는 거 아냐?"

라고 하자 곧 일을 하게 될 텐데 어떻게 경비를 하냐고 했다.

대리운전은 야맹증이 있어서 못한다고...

나도 모르는 병이 있었니?

밤에 집에 있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야맹증이라고?


그런 날들도 하루하루 지나가니 '이 또한 지나가리'가 되더라.



10년 동안 상환을 완료하고 은행의 권유로 처음 신용카드를 만들었을 때 세상을 다 얻은듯한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버스카드 충전만 안 해도 너무너무 좋을 것 같아서 더도 말고 딱 10만 원 한도만큼의 카드라도 있었으면 했는데 정말 새로 나온 카드의 한도가 10만 원이었다.

이제는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기에 카드 결제일은 목숨처럼 지켰다.

신용이 올라가면서 카드 한도도 비례해서 많아졌지만 내 씀씀이는 카드 한도가 아닌 수입에 맞춰 사는 것이 훈련이 된 터라 한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개인회생이 아니라 신용회복을 위한 채무상환이어서인지 생각보다 신용점수는 빠르게 올랐다.

지금은 1등급까지 올랐다.

써먹을 데도 없긴 하지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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