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응애예요!

[아들이 왔다]

by 한걸음씩

시집와서 아들하나 낳고 내리 딸을 낳은 엄마는 막내로 아들을 낳고 출산을 마쳤다.

아들 셋만 낳은 손윗동서에게 2남 4녀로 다산을 해서 쓸데없는 딸을 뭐 하러 많이 낳았냐며 갖다 버리라는 호된 시집살이를 했다.

고추보다 맵다던 동서 시집살이.

엄마의 동서인 큰엄마는 성격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 분이다.

게다가 떵떵거리고 잘 사는 큰집과 달리 하루하루 빌어먹듯 사는 흥부네 같은 우리 집이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였을것이다.


그러나 지금 큰 엄마는 아들들이 다 잘못되어 현재는 혼자 기초생활수급자로 살면서 "자네는 좋겠네"하며 딸 많은 엄마를 부러워한다.

큰엄마 뒷담화를 하려고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다.


그렇게 딸이 많은 것에 심한 열등감을 갖고 있던 엄마는 언니가 결혼해서 두 딸을 낳고 단산을 한 것에 대해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중간에 유산했던 아기는 분명 아들이었다든가, 셋째를 낳으면 아들일 거라든가 하면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둘째를 낳고 나서 형부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서

"이서방. 얘가 친정엄마 닮아서 또 딸 낳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라고 했는데

형부도 아들을 기다렸던 터라

"닮는 게 맞나 봐요."라며 서운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어 엄마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내가 결혼하여 첫아이를 낳을 때 엄마는 아들이기를 학수고대했다.

나 역시 첫딸을 낳았다.

딸은 외가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부담감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하나님께 서원기도까지 하며 아들을 원했다.

신앙이 없는 남편은 승용차에 고추모양의 장식품을 걸고 다녔다.

친구가 그렇게 해서 아들을 낳았다면서.

연년생으로 임신한 나는 그렇게 아들을 낳았다.

병원에서는 출산 전에 이미 아들이라고 알려줘서 짐작은 했다.

엄마는 수술당일 출근도 하지 않고 아침 일찍부터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파도 절대 결근하지 않는 엄마였는데 아들 손주가 뭐라고...


시어머니, 친정엄마, 언니, 남편이 나란히 앉아서 기다리던 그 날.

아들은 우리에게 찾아왔다.


지금은 성차별이라고 없어졌을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산부인과 수술실 앞에 고추 모양과 장미꽃 모양의 전등이 있었다.

출산후에 아들이면 고추에, 딸이면 장미꽃에 불이 들어왔다.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거의 모든 산부인과 의원의 풍경이다.

수술이 늦어져서 전등에 불이 켜지지 않자 엄마는

"아들이라고 해놓고 딸이라서 불을 못 켜고 있나 보다"하며 안절부절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다.


수술이 끝나고 고추모양 등에 불이 들어오자마자

"와!! 고추다 고추!!!" 하면서 일어서서 팔짝팔짝 뛰면서 만세를 부르니 주변에서 시어머니 되시냐고 물었단다.

7대 독자쯤 되는 집에서 귀한 아들을 낳은 것처럼 기뻐하는 모습이었으리라.

남편도 아들을 간절히 원했지만 엄마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서 이 글에서 언급은 안 한다.

그때부터 딸도 귀여움을 받았다.

남동생의 터를 잘 팔고 나왔다고.


"애기 좀 데리고 올래?"


친정엄마는 일이 끝나고 집에 도착하면 종종 전화를 하시곤 했다.

연년생이라 움직이는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가 워낙 아들을 보고 싶어하시니 하나는 업고 하나는 손을 잡고 걸어갔다.

멀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못 기다리고 엄마는 한달음에 마중을 나왔다.

하루종일 일을 하고 지칠 법도 한데 어디서 저린 힘이 나올까 싶었다.


친정 엄마의 열등감을 단번에 치유해 준 아들은 내 눈에도 너무 예뻤다.

얼마나 분별이 없었는지식사하시는 엄마 바로 옆에서 똥기저귀를 갈기도 했다.


"엄마, 얘는 똥냄새도 어쩜 이렇게 구수하지?"


철딱서니라고는 하나도 없는 딸이다.



주변의 사랑을 오롯이 혼자 받고 자란 아들은 병치레가 많았다.

모유 수유를 하면 면역력이 강하다는 말도 아들에게는 '해당무'였다.

감기가 한번 걸리면 오래도록 낫지 않았고, 조금만 지나면 금세 폐렴으로 진행됐다.

장염은 또 얼마나 자주 걸렸던지...

그때마다 입원을 하다 보니 소아과 의사는 물론이고 간호사들도 얼굴을 알 정도도 단골환자가 됐다.

그러나 폐렴이나 장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번은 장중첩증에 걸린적이 있다.

아직 혼자 일어 서지도 못하는 고작 몇 개월밖에 안 되는 아기를 치료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항문으로 약이 들어가면서 비엔나 소시지처럼 꼬인 장이 하나씩 풀어질때마다 괴성에 가까운 악을 쓰며 울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간호사와 함께 아들을 붙잡았다.

돌도 안된 연약한 아기가 이렇게 힘이 세다니...

얼마나 아팠으면...

엄마가 정말 미안해...


아들이 조금씩 커가면서 입원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감기는 항상 달고 살았다.

좋다는 한약도 먹여보고, 영양제도 먹였는데 눈에 보이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또래보다 키가 한뼘정도는 작았지만 친구가 많아서 종종 집에 데리고 왔다.

잘 먹는데도 키가 작고 말라서 체질이려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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