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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걸음씩 Apr 02. 2024

아! 응애예요!

[아들이 왔다]

시집와서 아들하나 낳고 내리 딸을 낳은 엄마는 2남 4녀로 출산을 마쳤지만 쓸데없는 딸을 뭐 하러 많이 낳았냐며 갖다 버리라는 손윗 동서의 호된 시집살이를 했다.

고추보다 맵다던 동서 시집살이.

엄마의 동서인 큰엄마는 성격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 분이다.

게다가 떵떵거리고 잘 사는 큰집과 달리 하루하루 빌어먹듯 사는 흥부네 같은 우리 집이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였을것이다.


아들만 셋을 낳고 자랑스러워하던 큰 엄마는 아들들이 다 잘못되어 현재는 혼자 기초생활수급자로 살면서 "자네는 좋겠네"하며 딸 많은 엄마를 부러워한다.

큰엄마 뒷담화를 하려고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다.


그렇게 딸이 많은 것에 심한 열등감을 갖고 있던 엄마는 언니가 결혼해서 두 딸을 낳고 단산을 한 것에 대해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중간에 유산했던 아기는 분명 아들이었다든가, 

셋째를 낳으면 아들일 거라든가 하면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둘째를 낳고 나서 형부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서

"이서방. 얘가 친정엄마 닮아서 또 딸 낳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라고 했는데 

형부도 아들을 기다렸던 터라

"닮는 게 맞나 봐요."라며 서운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어 엄마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내가 결혼하여 첫아이를 낳을 때 엄마는 아들이기를 학수고대했지만 나 역시 딸을 낳았다.

딸은 외가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태어났고, 연년생으로 임신한 나는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병원에서는 출산 전에 이미 아들이라고 알려줬기 때문에 엄마는 수술이 잡힌 날 출근도 하지 않고 아침 일찍부터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파도 절대 결근하지 않는 엄마였는데 아들이 뭐라고...


시어머니, 친정엄마, 언니, 남편이 나란히 앉아서 기다리던 그 날.

아들은 우.리.들에게 찾아왔다.


지금은 성차별이라고 없어졌을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산부인과 수술실 앞에 고추 모양과 장미꽃 모양의 전등이 있었다.

수술 후에 아들이면 고추에 딸이면 장미꽃에 불이 들어왔다.

수술이 늦어져서 전등에 불이 켜지지 않자 엄마는 

"아들이라고 해놓고 딸이라서 불을 못 켜고 있나 보다"하며 안절부절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다.


수술이 끝나고 고추모양 등에 불이 들어오자마자

"와!! 고추다 고추!!!" 하면서 일어서서 팔짝팔짝 뛰면서 만세를 부르니 주변에서 시어머니 되시냐고 물었단다.

7대 독자쯤 되는 집에서 귀한 아들을 낳은 것처럼 기뻐하는 모습이었으리라.

남편도 아들을 간절히 원했지만 엄마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서 이 글에서 언급은 안 한다.

그때부터 딸도 귀여움을 받았다.

남동생의 터를 잘 팔고 나왔다고.


친정엄마는 일이 끝나고 집에 도착하면 손자가 보고 싶으니 데리고 오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셨다.

연년생이라 움직이는게 쉽지 않았지만 엄마가 워낙 아들을 보고 싶어하시니 하나는 업고 하나는 손을 잡고 걸어갔다.

가까운 거리도 반나절쯤 걸리기가 일쑤니 그걸 못 기다리고 엄마는 한달음에 마중을 나왔다.

하루종일 일을 하고 지칠 법도 한데 어디서 저린 힘이 나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친정 엄마의 열등감을 단번에 치유해 준 아들은 내 눈에도 너무 예뻤다.

식사하시는 엄마 바로 옆에서 똥기저귀를 갈면서 "엄마, 얘는 똥냄새도 어쩜 이렇게 구수하지?" 했던 철딱서니 없는 나에게 "그래도 밥상 옆에서 똥은 좀 아니다"라고 답을 했던 엄마.

그 엄마의 사랑을 아는지 아들은 유독 외할머니에게는 마음이 약하다.


이렇게 주변의 사랑을 독차지 했지만 아들은 병치레가 많았다.

모유 수유를 하면 면역력이 강하다는 말도 아들에게는 '해당무'였다.

감기가 한번 걸리면 오래도록 낫지 않았고, 조금만 지나면 금세 폐렴으로 발전했다.

장염은 또 얼마나 자주 걸렸던지...

그때마다 입원을 하다 보니 소아과 의사는 물론이고 간호사들도 얼굴을 알 정도도 단골환자가 됐다.

그러나 폐렴이나 장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장중첩증에 걸려서야 알았다.

아직 혼자 일어 서지도 못하는 고작 몇 개월밖에 안 되는 아기를 치료하면서 강한 줄 알았던 나는 처음으로 참기 힘든 눈물을 흘렸다.

온몸이 새빨갛게 충혈 되도록 악을 쓰며 고통을 호소하는 아들을 안고 계속 울었다.


"미안해..엄마가 미안해..너무 미안해.."


아들이 조금씩 커가면서 입원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감기는 항상 달고 살았다.

좋다는 한약도 먹여보고, 영양제도 먹였는데 눈에 보이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해서 매일 집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왔고, 에너지가 넘쳐서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는 아들은 여는 사내아이들처럼 잘 자랐다.

키가 좀 작고 몸이 말라서 원래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인가보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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