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예감

버틴다는 건,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올까

by stephanette

오랫동안 쓰고 싶었으나 쓰지 못한 영화, 드라마에 대한 감상을 썼다.

이제는 쓸 수 있게 되었나보다.


자주 보던 영화와 드라마였음에도

오늘 다시 보는 감상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도서 등 인풋은 나 자신을 스스로 점검하는 잣대가 된다.


좋은 스피커를 청음하는 조건과 같다.

늘 듣는 노래를

청음한다.

얼마나 많은 소리들을 선명하게 재생하는지

그 공간감이 얼마나 멋진지 알아보려면

익숙한 음악이 필요하다.


평생을 함께 한 콘텐츠가 있다는 건

그런 의미이다.


죽음에 대해 말을 하려다가 또 삼천포행이다.

늘 그렇다.


그리 편안한 주제는 아니다.

생각을 하기에도

말을 하기에도.

글을 쓰면

마음은 가벼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그리 걱정할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연애시대는 늘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드라마가 나온 2006년 그 때부터 그랬었다.

그걸 뭐라고 말해야 불편하지 않을지는 모르겠다.


그 이전에 나는 상실을 경험하고

삶이 한 번 망가졌었다.

그리고 난,

요양 중이었다.


죽음에 대해 말하자면,

십대 때,

난 늘 죽음에 대해 동경했다.

그저 동경했었다고만 말하자 싶다.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말하기엔 그리 아름답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러지 않기 위해서

- 모든 생명체는 생존이 목적이다.

"30까지만 버티겠다"

라고 목표를 정하고 버텼다.


그리고

30이 넘은 이후로는

이 드라마가

죽음을 대신 해줬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하루키 소설과도 같은 그런 것 아닐까.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며

나의 우울함을 공감하는 이가 세상 어디엔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래서 우울함을 잊고 살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를 좋아한다.


연애시대도 그런 드라마이다.

현실적이고 진솔하고 웃기다.

그래서 좋다.

고맙게 생각한다.


연애시대 드라마라는 뫼비우스 띠의 결계 속에 가둬버리지 않았다면,

죽음의 그림자는 지속적으로 나를 들쑤셨을 것이다.

그저 예감이라고 하자.


지금은,

'연대'에 나를 맡기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생존을 멈추지 않는다.

딱히 그 생존이 그럴싸한 대단한 것이 아닐지라도

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결국 사람 아닐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당연한 것의 당연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