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의 만화 감상
-후르츠 바스켓

방심하고 만화를 읽다가, 무의식의 습격을 받다니.

by stephanette

책을 덮었다. 읽다 말고.

갑자기 심장이 멈춰버렸다.

숨이 얼어붙어

등골이 서늘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눈앞이 페이드 아웃.

내 안에 있던 어떤 것이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는 며칠 동안 멈추지 않았다.

몸은 차가웠다. 그리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숨을 쉬려고 입을 열었다.

차갑고 찐득한 검은 액체가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허우적대고 싶었지만,

다리는 굳고

손은 엄청난 중량으로

나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검은 액체의 아래로.


후르츠 바스켓

형체가 없는 것의

형체를 보게 한 책이다.

"무의식"이라고 하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그 틈새에서

'망가지고 버려진 나'를 만났다.

그리고, 긴 침묵 속에 나는 갇혔다.


시간이 멈춘 듯,

귀가 먹먹해져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30년 전쯤이었나, 단골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나에게 이 책을 건넸다.

그녀도 나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을 500살 할머니처럼 꿰뚫어 보는 사람.

“세도나에 가 봐. 기적이 일어난대.”

메주고리에처럼 영혼이 맑아진다는 그곳까지…

어쩐지 이유를 묻고 싶지 않았다.

그저 마주하기만 하면 알게 될 테니까.


후르츠 바스켓, 일명 ‘후르바’.

어느 한 페이지쯤에서 나는 확실히 자극당했다.

그리고 그 충격이,

12가지 맛의 상처를 품은 소마 가문에게로

나를 이끌었다.

후르바 속 12명 각각의 상처는 아래와 같다.


소마 가문의 12간지에 얽힌 저주자들의 어린 시절 상처

- 일부러 자세히 쓴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은 스스로 지워버리니까, 자각조차 어렵다. 무의식의 대면은 허들이 많다.


1. 투명인간의 고통

외면과 방치: 가족에게 존재 자체를 잊힌 채 살아가는 고독

가정 내의 투명인간: “나 없으면 그만”이라는 무심한 시선이 남긴 자아 부정

2. 폭력의 그림자

직접적 신체 폭력: 피하거나 막을 수도 없었던, 고통의 흔적

간접적 정서 학대·언어 폭력: 매사에 “넌 잘못됐다”라는 말이 입 안에 맴돌던 상처

3. 자기비하의 심화

“나는 태어날 때부터 잘못됐다”: 뼈속 깊이 박힌 죄책감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존재가치를 스스로 거부하게 된 자괴감

4. 방어적 불안

감정 폭발·회피

“난 곧 상처받고 버림받겠지.”라는 불안감에,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발하거나

다가오는 이들을 미리 밀어내고 거부함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을 거야”: 비관 속에 마음의 문을 닫음

5. 이미지 유지의 공포

“예쁘고 똑똑한 이미지” 강박: 버려질까 봐 감정을 누르고 완벽을 연기

“강해지지 않으면 사라질 거야”: 약함을 드러내는 순간 존재가 위태로워진다는 공포

6. 억압된 욕구

사랑 기억의 삭제: “가문을 위해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는 강요로, 진짜 감정마저 지워버림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모른다”: 스스로에게조차 묻지 못한 채 억눌린 갈망

7. 고립과 정체성 혼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 인종·양자·입적 등으로 인한 따돌림과 고립감

화이트 & 블랙 캐릭터 사이: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는 정체성의 혼란



여자 주인공 토오루,

당장 잘 곳도 보호자도 없는 여학생, 늘 교복을 입고 있다.

다른 입을 옷이 없는 것인지도.

어머니를 잃고 조부모도 사고사.

스스로 환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소녀이다.

밝고 낙천적이라서 그나마 덜 불쌍해 보이는 캐릭터이다.


고통을 당해봤으니,

타인의 고통도 잘 이해한다.

그녀는 소마 가문 한 구석에 잘 곳을 얻고 얹혀서 살게 된다.


소마 가문의 12명의 인물들에 대해 점점 알아가고

'가족'이 되면 행동도 왜 그러는 건지도 잘 알 수밖에 없다.

토오루와 12명의 동물남자들이 가족이 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서서히 저주에서 벗어난다.


이 책은 무의식이라는 지하 창고의 문을 열어주었다.

사실, 저주에서 벗어난다는 지점까지 가는 걸 바라지도 않았다.

그걸 건드리는 그 지점이 많은 것을 변하게 해서.

문 너머의 상처와 어둠을 마주하는 용기를 주는 책이다.

방심하고 만화를 읽다가

무의식의 습격을 받다니.


그런 의미에서

후르바는

멋진 칼이다.

푸-욱! 하고

깊이 찔렸다.


그 상처를 마주할 용기가 있다면,

후르바를 강력 추천한다.





사족

후르츠 바스켓, フルーツバスケット (Furūtsu Basuketto) (줄여서 Furuba 또는 Fruba)

원작자: 타카야 나츠키 (高屋 奈月, Natsuki Takaya)

장르: 로맨틱 코미디 · 일상물 · 판타지(슈퍼내추럴)

연재 기간: 1998년 7월 18일 ~ 2006년 11월 20일

단행본: 전 23권 (1999년 1월 19일 발매 시작, 2007년 3월 19일 완결)


* 페이퍼 북을 추천한다. 애니메이션 판으로는 무의식 대면이 어려울 수 있다.

1. 페이퍼 북에는 각 캐릭터의 심리묘사, 세부 에피소드가 풍성하다. 호흡과 속도를 조절해서 대사, 독백을 곱씹으며 읽을 수 있는 장점. 컷마다 배치한 은유나 연출(배경 톤, 칸 나누기)이 잘 살아있고, 이를 애니메이션에서 1:1로 재현하기는 어렵다.

2. 후루바 애니메이션 2001년판 : 23권 중 초반 5~6권 분량만 다룸/ 생략되거나 재배치된 장면들이 있음

3. 후루바 애니메이션 2019년 리부트판 : 23권 전체를 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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