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예감

여행을 가게 되는 시즌이군. 나를 머무르게 하는 공간들.

by stephanette

*사진 by stephanette.


머무름의 여행

젊을 때는 여행이 삶의 중요한 모험처럼 느껴졌다.

낯선 곳을 찾아 떠나고, 새로운 풍경과 언어와 기운을 맞이하는 일.


그러다 어느 순간, 이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긴 여행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남들과의 비교가 아니라, 더 이상 직접 가서 체험하고 싶은 곳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에 문득 가보고 싶은 곳이 생기긴 했다.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포르투갈의 공산당 주택단지.

그의 작품 가운데 유독 마음에 남는 공간이다.


휴가는 가까울수록 좋다.

늘 가는 길로 가고, 늘 먹는 음식을 먹는다.

그 외의 번잡스러움은 사양이다.

여행은 결국, 쉬기 위한 것.


그러나 떠올려보면 마음속에 각인된 장소들이 있다.


제주도의 포도호텔

이타미 준 (伊丹潤, 유동룡) 재일한국 건축가의 작품이다.

제주의 풍토를 반영하고 주변 경관과 조화를 신경썼다는 것이 느껴진다.

나지막한 호텔의 지붕과 그 곡선들은 작은 오름들의 완만한 기복을 닮아있다.

바람에 따라 돌담을 쌓아올리고

자연광과 그림자는 시시각각 다른 모양을 실내에 만들어낸다.

나무로 된 한옥의 창틀과 같은 그 격자무늬와 은은한 자연광은 수도원에 온 착각을 일으킨다.

호텔 안에는 일본에서 재료를 공수해 만든다는 튀김우동집이 있다.

골프 코스에 딸린 클럽하우스 한켠,

사람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공간이 멋스럽다.

사뭇, 기도를 드리는 마음으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우동을 먹게 된다.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수도원

아시시를 향해 가는 차 안에서는

느긋하고 낮은 언덕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낮은 올리브 나무들이 있다.

눈부신 햇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빛나는 잎사귀들

한적한 아시시에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사람 크기의 성상이 있다.

그의 손에는 늘 비둘기가 앉아 있다고 한다. 역시나 새들은 그 주변에 모여 있었다.

수도원에서 묵었다. 하얀 침대보 위에 청색의 패브릭이 장식된 곳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외창을 열면, 검은 철제 창문 아래로 오렌지 나무가 보인다.

둥그런 오렌지들이 녹색 잎 사이에서 주황색으로 빛난다.

수사님은 그 오렌지를 투박한 나무 접시에 담아 갖다 주었다.

금식 기도 중이라 먹지 못하고 창가에 올려두었다.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이를 지향을 위해 바치는 것도 기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수도원의 식당은 노란색이다. 테이블에는 하얀 테이블 보가 씌어져 있다.

메뉴는 늘 같은 파스타이다. 며칠 만에 금식이 끝나고 식사를 했다.

식당 한쪽 구석에 작은 자판기가 있다.

버튼은 십수가지이다. 우유와 함께 나오는 거품 가득한 커피 한 잔이 어째서인지 예술처럼 다가왔다.


하와이 하나우마 베이

하와이에서 몇 달을 머문 적이 있다.

나의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결정하던 때이다.

그 추억은 힘들 때, 러브레터처럼 나에게 당도한다.

그 곳의 친구들과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저 똑같은 고속도로 풍경 너머 걷고 있었다.

절벽 아래로 꿈같은 바다의 만이 펼쳐져있다.

얕은 물 속에 물고기들이 주변에 몰려든다.

그들과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편안함.

동화 속 니모 같은 열대어들과 함께 수영을 하던, 그 초현실적인 바다의 색.

그날의 빛과 윤슬은 아직도 내 안에서 반짝인다.


그리고 제주 서귀포의 어느 해안 절벽

찾아보면 지명을 알 수 있겠지만, 제주를 가면 늘 가는 해안 절벽이 있다.

절벽의 위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소용돌이는

마치, 청바지를 넣고 돌리는 세탁기 같다.

가을 하늘 같은 쾌청한 청색

넋 놓고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한 두시간은 훌쩍 지나가 있다.

관광객도 하나 없는 그런 숨겨진 장소이다.


해운대 까사 부사노

최근에 애정하는 곳이다.

시가 바인줄 알았는데, 에스프레소 바이다.

애정하는 가구들이 즐비하다. 놀의 테이블과 튤립체어. 그것 만으로도 갈만한 가치가 있다.

숙소를 근처로 정한다.

아무도 없는 아침 시간에 그 곳에 들려 낮은 조명 속에서 책을 읽는다.

에스프레소나 디저트 등을 다시 주문하기도 한다.

거대한 대리석 타원형 테이블 위에는 멋스러운 꽃꽂이가 있다.

체인으로 숙소가 있다면, 그 호텔의 내부가 매우 궁금할 정도이다.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와서 분주해지면,

근처 건물의 스카이 라운지에 있는 실내 수영장에 간다. 역시나 그 옆에는 바가 있다.

사람들은 별로 없다. 아직은 숨겨진 곳이다.

해운대 동백섬 근처에 '베이 101'로 자리를 옮긴다. 2층의 레스토랑엔 아무도 없다.

작은 찻잔과 접시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히 들린다.

검은 정장의 직원들이 준비를 하면서 분주하다.

텅 빈 공간에서 하얀 구조물들이 보이는 창가를 내다보며 머무르는 걸 좋아한다.

날이 쾌청하면, 1층 야외에서 요트 구경을 하기도 한다. 이국적이다.

마음에 드는 장소는 자주 간다. 몰입의 습관은 책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한동안은 해운대 여행을 하게 될 것 같다.


이 장소들을 나란히 놓아보면, 딱히 공통점은 없다.

그러나 하나만은 분명하다.

나는 여행지에서 새로운 것을 쫓기보다,

마음에 드는 공간을 발견해 그곳에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하릴없이 노닥거리며, 시간을 잊고, 공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일.

결국 나에게 여행은, 공간과의 대화이자, 나를 머무르게 하는 작은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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