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에선 그들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
*사진: Unsplash
직장에선 늘 같은 얼굴들이 반복된다.
잘난 척을 기본 탑재한 사람들,
말 한마디에 거짓이 묻어나는 사람들,
심지어 남의 에너지를 빼앗아야만 살아남는 듯한 사람들까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목소리는 유난히 크고 존재감은 더 뚜렷하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세상은 왜 악의적인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걸까?”
그러나 오래 바라보면 알게 된다.
그들이 잘 사는 것 같아도, 사실은 늘 불안에 잠겨 있다는 것을.
남에게 고통을 전가하며 얻은 권력과 인정은 잠시의 반짝임일 뿐,
안쪽에서는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트럼프는 잘 사는 걸까?
이스라엘은 잘 사는 걸까?
세상이 힘들어질수록 불안감은 더해가고 광기는 더 악랄해진다.
그러니, 악의 사람들이 행하는 것처럼 살아야 살아남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은 커진다.
내면 차원의 상승, 그 여정을 걸으면서
사람들의 본질을 더 잘 보게 된다.
승승장구하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악의 사람들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잠시 거짓의 언행으로 결과를 얻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겪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즉각적 과보와 시간을 두고 드러나는 과보와 내적 과보들이 있다.
불신과 불안은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거짓으로 얻은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억지로 세운 권력은 늘 위태롭다.
사주 역학에서도 관을 상하게 하면 자신의 관도 상한다.
다른 사람의 직업운을 상하게 하면, 자신의 직업운도 상한다.
90년대 후반부터 여러 직장을 다녔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 그런 일들을 많이 목격했다.
그러나, 아무리 뜯어말려도 사람들은 각자의 타고난 대로 자신이 머무르는 차원에 걸맞은 행동들을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받는다.
기업 스캔들이나 정치인의 몰락처럼 바로 드러나지 않아도 시간을 그것을 어김없이 드러낸다.
겉으로 잘 살아도 내면은 평화롭지 않다. 늘 증명해야 하고, 늘 불안해서
더 많이, 더 크게를 외친다.
우리는 가끔 '지금 당장 그들이 벌 받는 걸 보고 싶다.'라고 느낀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고 때로 잘 사는 듯 보이는 시간이 길다.
거짓의 사람들의 행태를 보고 있어야 하는 고통이다.
하지만 인과의 법칙은 생각보다 정밀하다.
타인에게 준 상처와 왜곡은 결국 돌아와서 그들의 삶을 뒤흔들고 무너뜨린다.
돌을 던지면 물결이 돌아와 부메랑이 되듯
그건 꼭 벌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고립, 불신, 내적 불안으로 반드시 나타난다.
그들이 받는 과보는 우리가 원하는 형식이나 속도와는 다를 수 있다.
과한 것들은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린다.
내면 차원의 상승의 여정을 걸으면서,
만나는 수많은 이들을 통해
여전히 악이 존재하고 거짓이 횡횡함을 보게 된다.
좋은 이들은 그들로 인해 고통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같은 거짓의 언행으로 살아야 할까?
거짓의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나는 거절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경계를 세운다.
이 것이 나의 여정을 걸어가면서도 현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3차원의 무겁고 경쟁적인 장(場) 속에서도,
나는 내 의식의 차원을 한 단계씩 끌어올리며 살아가기로.
직장에서의 생존은 결국 균형의 문제다.
남을 배려하되 나를 잃지 않는 것,
선을 넘는 요구에는 담담히 경계선을 긋는 것,
남이 던져놓은 불안을 덥석 받지 않고 내 중심을 다시 세우는 것.
배려는 꽃이고, 경계는 뿌리다.
꽃만 피면 금세 시들지만, 뿌리가 있으면 꽃은 다시 피어난다.
나는 선택했다.
남을 불안하게 하며 살아가는 길 대신,
내 안에서 차원이 상승하는 길을.
그리고 직장이라는 거대한 연극 무대에서도,
내 빛을 잃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