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연금술로 다시 태어난 나 3

연적 연금술, 헤르메스의 비의 본문 1

by stephanette

본문 첫번째 문단을 읽고


1. “이 신성한 과학의 시작은 주님에 대한 경외이며…”


영적 연금술의 ‘출발점’을 명시한다.

겉으로는 ‘주님에 대한 경외’라고 하지만, 실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경외를 의미한다.

즉, 연금술의 첫 단계는 외부 세계의 물질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정화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경고이다.


“그 끝은 우리 이웃을 향한 자선과 사랑이다.”

이건 놀라운 선언이다.

연금술이 개인의 ‘황금 만들기’가 아니라,

정화된 인간이 타인을 치유하고 돕는 사랑의 과학임을 말한다.

황금은 물질이 아니라 의식의 완성된 상태, 즉 ‘사랑으로 환원된 자아’이다.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황금 작품은 신전과 병원에 바쳐야 한다.”

이건 상징적으로 영적 봉헌을 의미한다.

‘신전’은 영혼의 영역, ‘병원’은 육체와 사회의 영역이다.

즉, 깨달은 자는 그 힘을 자기 영광을 위해 쓰지 않고,

전체 생명계를 치유하는 데 헌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심히 억압받는 나라들은 해방될 수 있으며, 부당하게 억눌린 죄수들은 풀려날 수 있다.”

이건 정치적 의미가 아니라, 의식의 해방을 뜻한다.

연금술적 빛(gnosis)이 확산되면,

무지와 집착이라는 감옥에서 인간의 영혼이 해방된다는 것.

즉, 진정한 연금술은 구원 기술이다.



연금술의 시작은 ‘신에 대한 경외’, 목적은 ‘인류애의 실천’이다.

그러니 수련자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세상을 위해 봉헌하기로 마음 먹고 내적 정화를 시작한다.


질문들

정화란 무엇인가?

인간이 정말 정화될 수 있는가?

나는 왜 늘 교만해지는가?


이 세 문장은 사실 하나의 질문이다.

“나는 어떻게 내 안의 신성을 잃지 않으면서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까?”



1. 정화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는 것’이다.


고대 연금술에서 정화(purificatio)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불순물의 진짜 본질을 알아차리는 과정이다.


‘더러움’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 더러움 속에 숨어 있던 의식의 어두운 에너지를 빛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즉, 정화란 지우는 일이 아니라 통합의 예비 단계이다.


정화는 고백이 아니고, 자기혐오도 아니다.

그건 “이 감정이 나라는 걸 인정하는 것.”

분노가 올라오면 “나는 분노한다.”

질투가 생기면 “나는 질투한다.”

그걸 판단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는 것,

그게 정화의 시작이다.



2. 인간은 완전히 정화될 수 없다 — 그리고 그게 아름답다.


인간은 완전히 정화될 수 없다.

왜냐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혼탁함과 신성이 동시에 깃든 그릇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정화는 곧 ‘완전한 신성화’를 뜻하고,

그건 인간의 형체로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늘 불완전한 채로 빛을 향해 걷는 존재이다.


불교에서는 그걸 “탐진치(貪瞋癡)가 사라지지 않더라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고,

융은 “인간은 완전하지 않지만, 통합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정화는 도달점이 아니라 계속해서 깨어 있는 상태다.

탁함이 올라올 때마다 그것을 의식의 빛에 비추어보는 일,

그게 평생의 연금로이다.

삶은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이다.



3. 교만은 정화의 반대가 아니라, 정화의 징후다.


나는 늘 교만해진다.

교만이란 정화의 과정에서 생기는 잔열(殘熱) 같은 것이다.


왜냐면, 의식이 확장될 때 인간은 잠시 신의 자리 착각을 한다.

그건 당연한 현상이다.

빛을 본 사람은, 그 빛이 자신인 줄 착각하는 시기를 반드시 지나간다.


하지만 진짜 정화는 그 순간 자기 교만을 자각하는 능력에서 완성된다.

즉, “나는 교만해진다”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인식 자체가

이미 정화의 한 형태이다.

깨끗해지려는 의지를 가진 자만이

자신의 교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만은 죄가 아니라,

의식이 자라날 때 생기는 성장통이다.

또 다른 나는 그런 나를 관찰한다.



4. 정화는 ‘언어의 불’이다.


정화는 명상이나 침묵의 행위보다,

글쓰기라는 불의 의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감정을 피하지 않고 글로 굽는다.

그건 불에 던지는 의식이다.

“나는 감정을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그걸 도자기로 만든다.”

— 이게 바로 내 방식의 정화이자 글쓰는 수많은 이들이 이미 걷고 있는 길이다.


정화는 감정의 억제가 아니라 감정의 변환이고,

그 과정에서 언어가 연금로가 된다.

그 불 속에서 교만, 분노, 연민, 사랑이

모두 새로운 형태의 빛으로 변화한다.



5. 진짜 정화의 징표는 ‘유연함’이다.


사람이 정화될수록 단단해지는 게 아니라, 유연해진다.

판단하지 않고,

증오하지 않고,

모든 것을 통과시키는 투명한 존재가 된다.


이미 그 길 위에 있다.

“나는 교만해진다.”

“그래서 다시 내려놓는다.”

이걸 반복하는 존재,

그게 바로 정화 중인 인간의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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