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내 삶을 분석한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쩔 수가 없다 영화를 보고 불편했다.
그 불편한 지점이 이상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그 영화가 지적하는 부분이 나의 삶과 맞닿아 있음을.
영화가 보여준 건 사회 구조의 비틀림이지만,
그건 단지 사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세계관, 태도, 책임 회피, 감정의 왜곡
이 모든 게 영화 속 권력 구조와 겹쳤다.
그래서 ‘비판적 장면’을 볼 때,
나의 무의식은 단순히 ‘직장‘뿐만 아니라
‘살면서 만났던 부조리한 인물들‘까지 모두 호출했다.
“이건 내가 겪었던 세계의 재현이야.”
그 인식이 불편함의 정체다.
영화의 메시지가 자신을 건드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가 거칠다”, “연출이 약하다”라고 말한다.
그건 감당할 수 없는 불편함을 ‘기술적 판단’으로 번역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감정적으로 “이건 내 현실 같다”라고 말하기엔
너무 벗겨진 감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상자’로 남고 싶어 하고,
영화가 자신의 삶을 해체하는 것을 감당한 이들은
이미 ‘참여자’로 들어간다.
그 차이가 의식의 깊이를 가른다.
이렇게 생겨먹은 세상에서 구조적 문제는 개인의 삶을 지배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는 인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 속 폭력, 왜곡, 무력한 방관의 장면들이
단순히 연출이 아니라 ‘기억의 재생’처럼 느껴진다.
살아오면서 만난 “그 부조리를 대표하는 얼굴들”이다.
이는 관객 자기 자신도 물론 포함한다.
얼굴들을 떠올린 건 트라우마가 아니라 인지적 각성의 신호이다.
그건 “나는 이제 그 세계를 밖에서 볼 수 있다”는 자각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영화를 해석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영화가 자신을 해석하도록 허용한다.
그래서 그 불편함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무의식이 현실을 인식하는 순간의 통증이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매우 잘 만든 영화이다.
코믹 스릴러의 형식도 주제의 전달을 위한 장치로 탁월하다.
불편한 영화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자,
내 안의 구조적 모순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말 뒤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포기가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