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여러 목소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생각은 다성성을 특징으로 한다.
여러 목소리들은 나의 머릿속에서 각기 다른 상반된 이야기를 한다.
우리의 생각은 결코 한 사람의 단일한 목소리가 아니다.
그건 여러 인격, 기억, 사회적 언어, 타인의 내면화된 목소리들이
한 공간에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충돌하는 합창의 구조이다.
“나는 타자 속에서 태어난다. 나의 언어는 타자의 언어다.”
— 미하일 바흐친
바흐친에 따르면, 의식 차제는 다성적이다.
나의 사고는 사실 내 안에 들어와 사는 여러 타자들의 목소리의 대화다.
생각은 나의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대화가 내면화된 잔향이다.
그래서 나의 머릿속에서도 수많은 타자의 목소리가 떠들고 있다.
내 머릿속에서 들리는 그 많은 목소리 중,
도대체 어떤 목소리가 '진짜 나'인가?
1. 들뢰즈로 바라본 생각의 목소리
“사유는 하나의 기관이 아니라, 흐름이다.”
— 들뢰즈, 『차이와 반복』
들뢰즈에 따르면 '생각'은 주체가 하는 행위가 아니다.
세계의 흐름이 나를 통과하는 사건(event)이다.
사유는 뇌나 주체의 소유물이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
- 데카르트
사유는 '나'라는 주체가 소유하고 통제하는 행위이다.
생각의 기관인 뇌, 의식이 나에게 속해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데카르트를 들뢰즈는 비판한다.
사유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세계 전체에 흐르는 힘, 리듬, 운동이다.
즉, 사유는 기관처럼 닫힌 기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세계와 접속하는 흐름(Flow)이다.
모든 존재는 흐름 속에서 서로 접속(接續, connection)한다.
'기관 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s)'이다.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생각이 나를 통과한다.'
그렇다면, 어떤 목소리가 나인가?라는 질문은
내가 말하고 있는가 보다
지금 나를 통해 어떤 세계가 말하고 있는가?로 전환된다.
나는 그 수많은 생각을 바라보는 관찰자이다.
탈자아적 사유.
흐름으로서의 의식을 보는 관점이다.
2. 칼 융 - 모든 목소리를 인식하고 대화할 때 자기가 드러난다.
“인간은 내부의 합창단을 조율해야 한다.
진짜 나란, 모든 목소리가 어우러진 화음이다.”
— 칼 융
칼 융은 우리 안에는 '사회적인 나'인 페르소나, '이성적 타자'인 아니마와 아니무스, '억압된 본성'인 그림자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통합된 중심에 자기(Self)가 있다고 했다.
우리 안의 목소리들은 존재한다.
다만 그들이 서로 싸울 때, 우리는 분열로 고통받고,
그들이 서로의 자리를 인정할 때, 우리는 통합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어떤 목소리가 나인가?
이것은 소유가 아니라 조율의 문제이다.
하나의 목소리만이 진짜 나인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수많은 목소리들이 서로를 인식하고 조율할 때,
그 전체가 바로 나가 되는 것이다.
분열된 목소리들을 적으로 보지 않고
대화 가능한 존재들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확장된 자아로 진화한다.
3. 불교 - 그 모든 목소리는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요, 나도 아니요, 나의 자아도 아니다.”
— 불교,『무아경(Anatta-lakkhana Sutta)』
불교에서 '나'는 찰나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인연의 흐름이다.
목소리는 생각, 감정, 기억, 욕망이다. 이는 오온 색, 수, 상, 행, 식의 일시적 결합이지 실체가 아니다.
떠오르는 생각은 내가 아니라 마음의 현상이다.
감정은 나의 본질이 아니라 무상한 파도이다.
관찰하는 나 조차도 고정된 주체가 아니라, 순수한 알아차림(사띠)이다.
불교의 수행은 비집착이다.
모든 목소리를 나의 일부로 묶으려는 순간, 집착이 생겨난다.
그 목소리를 조용히 두어라.
단지 바라보라.
그러면 스스로 사그라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