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를 이해하는 대신, 세계와 함께 숨 쉰다.

메를로-퐁티의 미학, 감정의 살(flesh)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나는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세계의 한 눈이다.”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20세기 프랑스 현상학자이자 미학자이다.

그의 미학은

근본적으로 이원론을 부정한다.

나와 세계

주체와 객체

그 두 가지로 나누어진 관점 자체를 부정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나는 이미 세계의 한 조각이고,

세계는 이미 나의 감각 안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니,

예술가의 시선은 관찰이 아니라 공존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서로 스며드는 것


몸의 철학

"나는 생각한다"

에서 벗어나,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의 지각

즉, 몸을 통한 세계 경험이 곧 철학의 시작점이라고 말한다.


몸은 객체가 아니라, 세계와의 접속면이다.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살아있는 몸의 감각이다.

눈을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는 그 감각들이 이미 하나의 철학적 인식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동양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결을 같이 한다.


그의 후기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개념은 바로 살(flesh, la chair)이다.

살은 나와 세계가 서로를 감각하는 매질이다.

내 손이 테이블을 만질 때,

나는 테이블의 표면을 '느끼는 동시에 느껴진다.'


예전에 화학 혹은 과학 도서를 읽은 적이 있다.

아쉽게도 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다.

책의 내용은 성능 좋은 현미경으로 하루의 생활을 따라가는 서술이다.

모든 사물은 가루가 되어서 흘러내리고,

주인공의 몸에서도 가루가 흩어진다.

신문지의 잉크와 종이가루는 주인공의 손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태양의 햇빛 그 입자들은 주인공의 몸에 부딪히고 뒤섞이고

수많은 사물들의 경계는 흐려진다.

그런 관찰은 마치 허무맹랑한 SF 소설과도 같았다.

가끔 그 이미지를 떠올릴 때가 있다.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가 세계인가?


나와 세계의 경계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설의 감각 속에 얽혀 있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상호침투(intertwining)' 혹은 '살의 뒤얽힘'이라고 불렀다.

이는 물리적 접촉을 넘어서서

감정, 의식, 존재가 하나의 진동처럼 이어지는 구조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그는 예술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세잔은 눈앞의 사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서 세계의 리듬과 살아있는 현존을 포착한다.


"세잔의 그림은 눈이 본 것보다 더 깊은 것을 본다.
그것은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예술은 재현을 넘어서서

지각이 세계를 새롭게 드러내는 사건이다.

예술가는 세계의 살에 손을 대는 자,

보이는 것 너머에서 살아있는 보이지 않음을 느끼는 존재.


그러니

예술이란

보이는 감정 뒤의 진동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작가란 언어의 화가, 살을 언어로 번역하는 자이다.

그것은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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