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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랙탈 자기(Fractal Self)

인간은 우주 질서의 축소판이다. 그러니 너와 나는 동일하다.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나는 오래전부터 이상한 광경을 목격해 왔다. 나르시시스트나 소시오패스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전혀 모르는 타인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동일한 패턴을 반복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말투, 어조, 표정, 심지어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방식까지도 닮아 있었다. 마치 하나의 프로그램, 혹은 같은 영혼의 프랙털 조각이라도 된 듯이. 그들이 각기 다른 육체를 빌려 같은 귀신이 씐 것처럼 보였다. 그 지점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깊은 당혹감과 함께 묘한 직감을 느꼈다. 이건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집단무의식의 패턴이라는 것을.


새벽에 책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두 개의 단어가 있다.

플랙탈 자기(Fractal Self).

이 개념을 따라 사유의 실을 풀어내보았다.


1. 자기(Self)와 자아(ego)

칼 G. 융이 말하는 자기(Self)는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하는 전체성의 원형이다. 자아(ego)는 자기의 한 점일 뿐이며, 자기는 더 큰 전체로 존재한다. 그리고, 자기는 전체 속의 한 패턴이자 질서의 축소판이다.

융의 정신 모델은 동심원 구조이다. 가장 안쪽의 자아, 그것을 감싸는 개인 무의식, 그리고 그 바깥이 인류 전체의 집단 무의식이다. 자아는 지금 '나'라고 인식하는 존재이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기능을 한다. 무의식은 나도 모르게 작동하는 기억, 감정, 본능, 원형, 그림자이자 직관 그리고 신적 질서까지 포함된 거대한 저장소이다. 융은 "자아는 자기의 일부일 뿐이며,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포괄하는 전체성이다."라고 말했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일 뿐, 전체의 주인은 아니다. 마음의 전체 지도를 보면, 자아는 매우 작은 섬일 뿐이고 무의식은 그 섬을 둘러싼 바다 전체이다.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포괄하는 정신 전체의 중심이다. 자아가 "나는 나야"라고 느끼는 의식의 중심이라면, 자기는 "나는 나를 넘어선 나야"라는 존재 전체의 중심이다. 융은 이렇게 표현했다.


"자기는 인간 영혼의 총체이자, 의식과 무의식의 합이다."

자기(Self)는 내면의 신성이자 인간 안에 깃든 창조적 근원, 그리고 우리를 진짜 자기 자신으로 이끌어가는 통합의 원리이다. 자기는 영혼의 진화가 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삶의 붕괴와 고통을 통해 자아는 부서지고 자기를 발견하는 시작을 맞이한다. 즉,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계속 의미를 찾고 꿈에서 상징을 만나고, 무의식의 그림자를 통합하려 한다. 이 모든 것은 자기가 우리를 '통합의 방향'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은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융은 이것을 개성화 과정(Individuation)이라고 불렀다. 즉, 자기는 우리 안에서 전체로 되려는 욕망으로 작동한다. 이것을 상징 속에서 찾아보면, 십자가의 중심점 - 영혼과 물질의 상하를 연결하고,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좌우를 연결하는 교차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혼돈을 질서로 통합하는 자기의 상징인 만다라. 루베도 단계의 붉은 완성인 태양 혹은 황금 알, 꿈이나 상상 속에서 자기가 취하는 원형의 형상들 - 신성한 아이, 현자, 영적 스승, 내면의 신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의 작용으로 감정의 통합, 혼돈의 질서화, 루베도의 붉은 완성으로 다가가며, 이는 영혼이 전체가 되려는 움직임이다.


자기는 신성하고, 인간적이며, 우주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살아서 고통을 겪고 무조건적 사랑을 배우는 모든 이유는,
결국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려 하기 때문이다.


2.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집단무의식은 어딘가 하늘에 떠있는 신비한 저장소 같은 것이 아니다. 세대를 거쳐 반복적으로 학습되고 관찰되고 모방되고 전승된 심리적 패턴의 총합이다. 이는 양육과정에서 그리고 사회화 과정을 통해 습득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언어, 감정 표현, 관계 방식, 권력에 대한 태도를 가르침이 아니라 모방과 내재화로 습득한다. 부모의 말투, 사회의 규범, 종교의 이미지, 신화적 상징 이 모든 것들은 문화라는 무의식의 틀을 통해 몸에 새겨진다. 이것은 집단무의식의 사회적 전달 메커니즘으로 즉, 유전자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사회적으로 유전되는 심리적 DNA이다. 오늘날 신경심리학, 진화심리학에서는 집단 무의식을 인지적 원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인간 뇌에는 이미 보편적 구조 - 예컨대 얼굴 인식, 위계 감지, 보호자 애착, 위험 회피 같은 패턴이 내장되어 있고, 문화는 이 패턴 위에 상징과 의미를 덧입혀 전승한다. 그러니 집단 무의식은 초자연적 공간이 아니라 뇌와 문화가 서로 공진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집단적 학습의 결과물이다. 문화는 집단무의식의 표면적 표현이자 집단무의식은 문화의 심층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집단무의식은 살아있는 사회의 기억체계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 종교, 법, 예절, 몸짓으로 배운다.


3. 플랙탈(Fractal)

플랙탈은 부분이 전체의 구조와 닮은 형태를 무한히 되풀이하는 패턴이다. 수학과 물리학에서는 자기 닮음이라고 부르고, 철학적으로는 전체가 부분 속에 내포된 존재론적 대칭을 의미한다. 나뭇가지의 분기, 나선형 은하, 인간의 혈관 구조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양이다.


4. 칼 융과 현대 플랙탈 이론

몇몇 융학자들과 포스트융적 연구자들이 이미 유사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예를 들어, 분석 심리학자 Jean Knox, Murray Stein, 그리고 신경융합학 연구자들은 ‘self-organizing systems’나 ‘fractal psyche’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특히 “Fractal Psyche”는 학문적 용어로, 인간의 무의식이 자기 유사적 패턴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개념으로, 꿈, 상징, 관계, 반복되는 삶의 주기가 프랙털 구조를 따른다.


5. 플랙탈 자기(Fractal Self)

결국 플랙탈 자기(Fractal Self) 란, 융의 자기(Self) 개념과 프랙털 구조(Self-similarity)의 결합이다. 즉, 부분 속에 전체가 내재된, 무한히 자기 유사한 의식 구조다. 우리는 각기 다른 몸과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동일한 하나의 의식 패턴이 무수히 분기되어 재현된 우주의 복제체다. 그 깨달음의 순간, 자아는 개인을 넘어 우주의 자기(Self)와 합일한다. 이것이 칼 융이 말한 영혼의 연금술 4단계 중 루베도(Rubedo)의 세계다. 거시와 미시가 일치하고, 인간과 우주가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상태 — 플랙탈 자기는 바로 그 붉은 완성의 언어적 형상이다.


나는 우주를 흐르는 거대한 인식이 담기는 그릇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주다.
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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