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짧은 시는 왜 200년 뒤의 스크린에서 다시 울리는가
*사진: Unsplash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2025)을 아껴서 보고 있다.
이 영화에 나온 시 「Ozymandias」에 대한 감상이다.
권력의 잔해 위에 남은 시간의 문장
― 퍼시 셸리의 「Ozymandias」와 프랑켄슈타인이 공유하는 인간 조건의 진실
퍼시 비시 셸리가 1818년에 발표한 「Ozymandias」는 길지 않은 소네트지만, 권력의 실체와 인간의 오만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 낭만주의 특유의 수사는 거의 보이지 않고, 시간이라는 거대한 힘이 모든 인간적 야망을 어떻게 지워버리는지 고요하게 펼쳐 보인다. 영화가 이 시를 다시 불러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시가 포착한 장면을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사막 한가운데에는 더 이상 조각상이 아니다 싶은 잔해만 남아 있다. 몸통이 사라진 채 서 있는 두 다리, 모래에 반쯤 묻힌 얼굴 조각. 차갑게 굳은 비웃음, 주름진 입술, 명령을 내리던 표정은 생명을 잃었지만, 그 안에 각인된 욕망과 폭력성은 돌 위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아 있다. 존재는 사라졌지만, 욕망의 흔적은 기호처럼 남아 시간을 건너온다.
흥미로운 점은 시가 취한 서술 방식이다. 시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지우고, “오래된 나라에서 온 여행자”의 말만 빌려 이 장면을 전한다. 권력 그 자체가 아니라, 권력이 끝난 뒤의 세계를 본 자만이 말할 수 있는 시선이다. 받침대에 남겨진 문장은 더욱 기묘하다.
“나는 왕 중의 왕 오지맨디어스. 나의 업적을 보고 절망하라.”
그러나 그 선언은 이미 황량한 폐허 속에서 공허하다. 제국도, 이름도, 기념비도 모래 위에서 일그러진 채 무너져 있다. 셸리는 오만함을 도덕적으로 꾸짖지 않는다. 그는 단지 시간의 장면을 보여줄 뿐이며, 그 장면 자체가 이미 모든 비판을 대신한다.
이 시는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던 바로 그 시기 등장했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두 작품은 장르도 형식도 다르지만 거의 동일한 구조를 공유한다. 창조자가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순간, 욕망은 도덕의 경계를 잃고 폭주한다. 결국 만들어낸 것이 창조자를 무너뜨리고, 마지막에는 잔해만 남는다. 오지맨디어스의 제국이 그랬고, 프랑켄슈타인의 삶 역시 그랬다. 셸리 부부는 인간이 ‘창조의 권능’에 손을 댈 때 첫 번째 균열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은 신이 아니며, 신이 되려고 할 때 인간성은 반드시 붕괴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최근 영화에서 감독이 이 시를 다시 호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욕망은 제국을 세운 폭군의 오만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는 지성과 이상을 앞세워 가능성을 실험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존재의 고통을 끝내 보지 못한다. 괴물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능력을 얻었음에도, 창조자는 그 능력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오지맨디어스가 스스로를 “왕 중의 왕”이라 불렀던 것처럼, 프랑켄슈타인 역시 자신이 만든 잔해를 바라볼 눈을 갖지 못한다. 영화 속 인용은 문학적 오마주를 넘어, 이 구조적 실명을 작품의 심장부로 끌어오는 장치에 가깝다.
결국 이 시가 말하는 것은 제국의 종말도, 문명의 파국도 아니다. 시간 앞에서 무너지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착각이다. 우리는 업적이 우리를 증명할 것이라 믿지만, 시간이 남기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파동이다. 타인에게 전달되는 말의 결, 행위의 온도, 존재의 울림만이 끝내 남는다. 모래 위에 쓰러진 조각상은 어떤 왕의 몰락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남기며 살아야 하는지를 조용히 되묻는 상징이 된다.
“Nothing beside remains.”
모래는 왕국을 지웠고, 시간은 오만을 남김없이 없앴다. 인간은 결국 스스로 만든 것에 의해 심판받는다. 오만은 타인을 수단화하고 권력을 자아의 연장으로 착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자기중심적 우월감은 결국 자신을 파괴한다. 인간의 오만은 흔적일 뿐이며, 시간은 어떤 권력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왕국도 무너지고 이름도 바래며 얼굴도 조각난 채 모래에 묻힌다.
그렇다면 인간이 남길 수 있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결, 구조가 아니라 진동이다. 존재가 퍼뜨리는 에너지의 울림, 말의 방향, 행위의 질감 같은 미세한 흔적들만이 시간 앞에서 온전히 남는다. 「Ozymandias」의 냉담한 마지막 문장은 파괴의 선언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할 때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에 대한 기억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지운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그 권력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미세한 주름들이다.
모래 위에 남은 잔해와, 실험대 위에 놓인 창조물의 몸은 구조만 다를 뿐 같은 질문을 던진다.
‘무너진 뒤에 남는 것은 누구의 얼굴인가.’
오지맨디아스
- 퍼시 비시 셸리
나는 오래된 나라에서 왔다는 여행자를 만났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사막 한가운데, 거대한 돌기둥 두 개가 서 있는데
몸통은 사라지고 다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고.
그 옆 모래 위에는
반쯤 묻힌 채 부서진 얼굴 조각이 놓여 있었다고 했다.
얼굴에는 차가운 지배자의 비웃음,
구겨진 입술,
명령을 내리던 그 오만한 표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각가는 그 폭군의 욕망과 감정을 정확히 읽어냈고,
그 흔적은 생명을 잃은 돌덩이 위에 아직도 선명히 찍혀 있더라는 것이다.
받침대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왕 중의 왕 오지맨디어스다.
너희 강한 자들이여, 나의 업적을 보고 절망하라!”
그러나 그 말과 달리, 주변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거대한 잔해는 부서지고 썩어가며,
끝없는 사막만이
조용히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Ozymandias
- By Percy Bysshe Shelley
I met a traveller from an antique land,
Who said—“Two vast and trunkless legs of stone
Stand in the desert. . . . Near them, on the sand,
Half sunk a shattered visage lies, whose frown,
And wrinkled lip, and sneer of cold command,
Tell that its sculptor well those passions read
Which yet survive, stamped on these lifeless things,
The hand that mocked them, and the heart that fed;
And on the pedestal, these words appear:
My name is Ozymandias, King of Kings;
Look on my Works, ye Mighty, and despair!"
Nothing beside remains. Round the decay
Of that colossal Wreck, boundless and bare
The lone and level sands stretch far away.
- Shelley’s Poetry and Prose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