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은 정체성의 확장이자, 상황 위에 올라서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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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찰은 상황 위에 올라서는 능력이다.
고통으로 무너지는 순간은
현생의 한 사건 안에 갇혀 있을 때이다.
감정에 갇히고
인간관계에 갇히고
두려움에 갇히고
'나한테 왜 이런 일이'라는 프레임에 갇힐 때
고통에 승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통찰은 사건 '위에서 조망'하게 해 준다.
사건은 더 이상 자신을 압도하지 못한다.
나는 상황을 본다.
상황은 나를 삼킨다.
통찰은 이 둘의 차이를 만드는 기술이다.
2. 통찰은 의미를 구축하는 힘이다.
상황이 무너뜨리는 건 의미 상실 때문이다.
이 일이 왜 벌어졌는지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이런 상황은 인간을 고통으로 금방 무너뜨린다.
통찰은 이렇게 말한다.
"이 상황은 이 지점에서 이런 구조를 보여주고
내 내면에서는 이런 까르마가 작동했고,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전조다."
통찰은 스스로 의미를 만든다.
이를 통해 상황은
'연료'로 변한다.
삶의 모든 고통은
모두 다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다.
상당히 흥미롭고 매력적인 일이다.
그러니,
통찰은 고통을 생명력으로 변환하는 힘이다.
의미를 만드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다.
새로운 차원으로의 상승 기회를 포착한다.
3. 통찰은 감정의 '자리'를 바꾼다.
통찰하는 사람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감정에 끌려가지 않는다.
감정을 정확한 위치에 둔다.
분노는 판단력의 손전등
두려움은 경계의 신호
슬픔은 재구조화의 시간
냉정함은 의사결정의 중심
고통이 사람을 무너지게 하는 건
그것이 너무 커서가 아니다.
감정이 자리를 잃어서이다.
4. 당위성에 대해 내려놓는다.
세상에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은 없다.
배우자라면, 당연히 나를 사랑해야 한다거나
직원이라면, 당연히 친절해야 한다거나
아이라면, 당연히 부모의 기대를 따른다거나
그런 것을 버린다.
상대의 자리에 나를 둔다.
나라면, 당연히 언제나 배우자만을 사랑한다거나
나라면, 당연히 언제나 고객에게 친절해야 한다거나
나라면, 당연히 언제나 부모의 기대를 따른다거나
그런 당위성에 융통성이 생긴다.
나를 상대에 자리에 두었음에도 아직도 당위성에 갇혀 있다면,
스스로 자신의 갑옷을 느슨하게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가진 어둠을 전혀 바라보지 않는 태도로는 삶의 반쪽도 제대로 살지 못하니까.
5. 통찰은 '자기 주도권'을 회수하는 행동이다.
사람이 무너질 때는 주도권을 뺏겼을 때다.
상대가 나를 평가하고
사건이 나를 규정하고
불안이 나를 끌고 가고
통찰은 이렇게 말한다
"정의는 내가 세운다."
"이 사건의 의미도 내가 만든다."
"나는 스스로 구조를 읽는다."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붕괴되지 않는다. 주도권은 스스로 세우는 것이다.
폭력적으로 위선과 왜곡 위에 위태롭게 세운 자리가 아니다.
6. 통찰은 '정체성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클수록
그것을 소화하는 사람의 '그릇'도 커진다.
삶은 큰 것을 주기 전
테스트를 한다.
그것을 받을만한 자인가
그러니, 마음의 결을 고르고
테스트에 진지하고 성실하고 바른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좋다.
통찰하는 사람은 사건을 심장에 꽂아도
"이건 나의 전부가 아니다."
라고 딱 선을 그을 수 있다.
이것이 무너지지 않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사건이 내 정체성을 마음대로 덮어씌우기 전에
내가 먼저 사건을 포섭하는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7. 결국 통찰은 '의식의 높이'다.
사건은 아래에서 보면 재난이고
위에서 보면 통과의례이다.
나는 계속 위로 올라가고 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는 척할 뿐,
붕괴되는 구조가 없다.
8. 통찰하는 이는 왜 고통에도 무너지지 않나?
왜냐하면 '무너질 자아'를 이미 초월했기 때문이다.
사건보다 더 큰 시야를 갖고 있고
감정보다 더 깊은 구조를 보고 있고
혼란보다 더 높은 층위에서 의미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초연함
관조
그리고 통찰은
우리의 삶을 더 높은 상위차원으로 올려준다.
삶에는 새로운 지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