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의 인연 2

뭐 그리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하나의 꿈 이야기라고 하자.


하필이면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흙냄새를 풍기며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은

"투둑 툭"

소리를 내며 땅의 명도를 짙게 만들었다.

싸늘하게 식은 빗방울은 진눈깨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눅진해진 흙은 질척거리며 신발에 달라붙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구름이는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어깨는 젖은 채 하얗게 김이 피어오르고 있다.


"릴리시카, 어쩌지? 철문이 열리지 않아."

"흠.. 비가 오는 날인데 아직 작업 중인 거야?"

"그게 어찌하든 문을 열어야 부서진 탑을 수리하든 하니까."

"비가 그칠 기미는 안 보이는 걸. 이제 그만 쉬어."

"아니, 그래도..."

"할 수 없잖아? 속도를 내고 싶다고 그리 되는 건 아니니까."

"알았어."

"꿀이 들어간 캐모마일 차를 내려줄 테니까 뜨거운 수프를 먹고 마시도록 해."

"와~! 추웠는데... 역시"

"그래,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내일은 연통을 넣어 도와줄 사람을 찾아봐야겠어."


거세진 빗줄기는 폭포 같은 소리로 천지 사방을 울린다.

때마침 삭이라 그렇지 않아도 칠흑 같은 어둠은 철문을 지워버렸다.


철문. 이번 다음 생에는 사람으로 환생할 것이다.

아마도 그때는 단단하게 길을 가로막는 하나의 '물체'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부서진 왕국의 성

그 성으로 들어가는 게이트이자

얼마 남지 않은 성의 잔해들의 중심을 흔들어대며 쓰러지고 있는 상태이다.

작은 균열들은 철문의 밀도와 무게만큼 벌어지기 시작했다.

쓰러진 각도가 커질수록 왕궁은 위태로워졌다.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들어갈 구멍이 생긴 것도 아니다.

찌그러진 철문의 가장자리를 펴고 문을 강제로 열어버리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밤새 내린 비는 얼음이 되어

천지를 하얗게 덮었다.

반쯤 부서진 왕궁의 탑과 철문에는 지저분하게 눈이 그림을 그려놓았다.


"젠장, 얼어버렸군."

"릴리시카, 어제 작업을 했어야 했나 봐."

"아니, 도와줄 사람에게 연락을 했어."

"언제 도착할까?"

"그런데 웃기는 일이 생겼어."

"뭐가 웃겨?"

"아 블랙코미디지. 그 철문을 열어야 들어올 수 있대."

"이런.."

"그건 뭐다? 우리끼리 해야 한다는 거지. 음하하하하하. 웃기지?"

"하아... 릴리. 이런."

"그냥 알아서 철문이 다 무너질 때까지 기다릴까?"

"그럴까? 얼마나 걸릴까? 릴리?"

"흠.. 아마도 십 년? 그 정도는 걸릴 것 같아."

"이 상태로 십 년이라고?"

"하하하하하. 더 웃기는 군."

"릴리시카 어쩌지?"

"어쩔 수 없잖아. 그냥 계속 매일매일 작업을 하는 수밖에."

"알았어. 너무 많이 부려먹는 거 아니야? 이래 봬도 난 흡혈귀 왕국의 집사인데."

"그래그래 구름아, 내가 작위를 내려줄게. 내 대관식이 있는 날 같이 하자고."


철문을 열고 왕국의 탑을 재건하는 일은 매우 지난한 일이었다.

철벅거리는 진흙은 사방으로 튀고,

첨탑 안의 시신들은 썩어가고

역겨운 냄새는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작은 날파리부터 역겨운 냄새를 따라 모여들었다.

하루의 마무리는 죽음의 압생트라도 있어야 할 판이었다.


닿지 않는 곳이지만,

도와줄 이가 있다.

경계자(Guardian of Thresholds)이다.

심연을 읽고,

위험을 감지하고,

경계를 관리하는 자.


왕조의 기록을 담당하고 있던 그는

의식을 연구하고 기록하던 중

탑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지금

철문 반대쪽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는 왕궁의 비밀을 알고 있다.

의례를 지키며 금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그는

나를 충분히 도와줄 능력이 있으나

도무지 만날 방법은 없다.

철문을 해체하기 전까지.


매일의 작업은 진척이 없으나 그렇다고 멈춘 것도 아니다.

작업이 끝나고 나면

나는 나의 왕좌를 되찾고 대관식을 조촐하게나마 열 생각이다.

내가 가장 신임하는 이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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