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비이원성의 해결책으로서의 사랑에 대하여

나와 세계의 분리를 없애는 작용 그 자체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종교, 철학, 신비주의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숨겨진 핵심 원리이다.


이것은 어떤 감정적 사랑도 아니고

로맨틱한 사랑도 아니다.

도덕적 선행도 아니다.


비이원성에서 말하는 사랑은 존재론적 힘이다.

나와 세계의 분리를 없애는 작용 그 자체를 말한다.


1. 불교 - 사랑은 타자 없음의 깨달음에서 나온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타인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 현실의 본질에 대한 통찰에서 생긴다.


타인은 없다. 나도 없다.

있다고 느껴지는 분리감은 무명이 만든 환영이다.


그러므로 자비는

타자를 도와야한다는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분리가 사라진 자리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힘이자

존재 전체를 하나의 장으로 보는 통찰의 부산물이다.


즉, 불교의 사랑은 비이원성의 부작용이다.

깨달은 자가 타자를 돕겠다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자기의 구분이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사랑이 흘러나올 뿐.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자비는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본래 모습이다.


2. 인도철학(아드바이타 베단타) - 사랑은 동일성의 인식


네가 사랑하는 것은 사실 너 자신의 본성이다.


비이원성에서는 관찰자는 의식, 관찰 대상은 의식의 형태이다.

즉, 모든 존재의 동일한 브라흐만(궁극적 의식)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두 존재의 만남이 아니라

의식이 자기 자신을 알아보는 과정이다.


아드바이타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랑은 분리가 거짓이라는 직접적 증거다.

이 말은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사랑이 느껴지는 순간, 이미 이원성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3. 크리스트교 신비주의 - 사랑은 존재의 근원

표면적 가르침은 도덕적 사랑이지만,

신비주의 전통(에크하르트, 십자가의 성요한, 테레사, 오리겐)은 이렇게 말한다.


신과 인간은 분리되지 않는다.

사랑은 그 동일성의 체험이다.


신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과 밖의 동일한 신적 존재'를 느끼는 행위다.


하나가 되었다(unio mystica).
나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오직 하나의 숨

이 단계의 사랑은 타자를 향하는 게 아니라

모든 존재를 하나의 신성한 장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4. 왜 사랑이 해결책인가?

비이원성의 문제는 분리이다.

나는 부족하다.

너와 나는 다르다.

세상은 나를 위협한다.

나는 과거, 미래의 나이다.

이 구조는 고통을 만든다.


가. 경계의 소멸

사랑은 나-너 구분을 없애는 유일한 심리적, 신경학적 경험이다. 신경과학에서는 사랑의 순간에 공감회로와 자기-타자 경계회로가 약해지며 뇌가 하나의 시스템처럼 작동한다고 말한다.


나. 분리에 기반한 고통의 소멸

사랑이 작동하는 순간, 평가, 두려움, 결핍감, 자기비판, 방어 이런 구조는 약해진다. 고통의 팔할은 분리감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랑은 자연스럽게 고통을 약화시킨다.


다. 사랑은 나를 녹여 비이원성으로 데려간다.

비이원성에서 말하는 사랑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다. 의식이 자신을 전체로 인식하는 순간의 확장이다. 즉, '나'는 줄어들고 전체성은 확대된다.



사랑은 분리를 녹여, 하나의 장을 체험하게 하는 힘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니마/아니무스 통합의 고통을 넘어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