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 이해를 위한 올바른 태도
*사진: Unsplash
우리는 흔히 이해를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스-게오르그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이 통념을 근본부터 뒤집는다.
이해란
정보를 수집해 완성되는 결과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타인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다머는 이해의 출발점에서
아주 단호한 명제를 제시한다.
타인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말은 회의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이해를 더 정직하게 만드는 선언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해하는 주체인 ‘나’ 역시
이미 하나의 역사, 언어, 경험, 가치관 속에 놓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빈 상태로 타인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미 형성된 시선,
이미 축적된 경험,
이미 길들여진 언어를 통해서만
타인과 세계를 만난다.
지평과 지평이 만나는 자리
가다머는 이를 ‘지평(Horiz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타인에게는 그들만의 삶의 지평이 있고
해석자인 나에게도 나만의 지평이 있다
이때 이해란
한쪽이 다른 쪽을 정복하거나 흡수하는 과정이 아니다.
이해는 두 지평이 만나는 사건이다.
그 만남의 순간에는
이런 변화가 일어난다.
내가 옳다고 믿던 확신이 흔들리고
상대의 세계가 내 안으로 들어오며
그 결과, 이해 이전의 나는 더 이상 그대로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래서 진짜 이해는
언제나 약간의 불편함과 위험을 동반한다.
이해에는 태도가 필요하다
가다머는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조건으로
‘기술’이나 ‘방법’이 아니라 태도를 말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세 가지다.
1. 열려 있음
이해는 닫힌 결론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상대가 나의 생각을 흔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열어두는 태도에서만 시작된다.
2. 변화될 가능성의 허용
진짜 이해는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자세와 양립할 수 없다.
상대가 나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3. 타자를 타자로 존중함
상대를
나의 기준으로 재단하거나
나의 언어로 환원하지 않고,
끝까지 ‘타자’로 남겨두는 존중.
이 존중이 무너질 때
이해는 곧 지배나 해석의 폭력으로 변한다.
이해는 나를 안전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해는 결코 편안한 행위가 아니다.
이해는 나를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위험에 노출시킨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
내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이 모든 것을 감수할 때에만
이해는 실제로 일어난다.
이해란 타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변화될 위험을 감수하는 사건이다.
이해 이후의 나는 이전과 같지 않다
가다머의 해석학에서
이해의 기준은 명확하다.
상대를 얼마나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해 이후의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가이다.
진짜 이해는
상대를 ‘정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태도, 판단, 윤리, 선택에까지
여운처럼 영향을 남긴다.
그래서 이해는 언제나
윤리적 결과를 동반하는 사건이다.
맺으며
이해를 이렇게 정의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쉽게 말할 수 없게 된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라는 말은
곧 이런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통해
내가 변할 준비가 되어 있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이해를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로 다시 세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해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지만,
훨씬 더 진실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