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준비 중 - 500살 먹은 흡혈귀 할멈 릴리시카
* 이 시리즈는 4번째 브런치 북 시리즈 입니다.
1. 녹색연대기 https://brunch.co.kr/brunchbook/lumen3
2. 흡혈귀와 성수 디톡스 https://brunch.co.kr/brunchbook/lumen5
3. 흡혈귀의 결로방지페인트 https://brunch.co.kr/brunchbook/lumen6
4. 회피형 철인 29호 감정 도자기 공방 https://brunch.co.kr/brunchbook/lumen7
나는 500살 먹은 흡혈귀 할머니야.
종종 동안이라는 말을 듣지만, 그건 생존 전략일 뿐이야.
살아남으려면 감정도, 얼굴도, 기억쯤은 좀 얼려두어야 하니까.
매생이 먹는 뱀 ‘미도리 블랙’과
철인 29호는 저 먼 우주로 보냈어.
그들의 파편은 여전히 우주 어딘가를 떠돌고 있어.
그 잔여 에너지들이 감정의 흔적으로 남아서,
도자기들 속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지.
나는 그 감정 도자기들을 감정해 주는 공방을 열었어.
가끔 도자기를 직접 빚어보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해 연성은 늘 실패하는 것 같아.
요즘은…
베이비 핑크색 스파클링이 가득한 뱀으로
다시 환생하길 기다리고 있어.
기껏해야 '솜사탕' 같은 뱀이 되겠지.
하지만 그게 매생이 먹는 뱀의 다음 생이야.
요즘 지나가던 이들이 자꾸 묻더라.
"회피형 남자는 왜 그래요?"
"잇티제는 왜 감정을 무시해요?"
"인프피는 왜 혼자 앓고 있죠?"
나는 그냥 도자기를 굽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지.
그래서, 감정서 발행을 시작하기로 했어.
사적 원한은 없고, 감정 분석도 아니야.
단지 나는 보이지 않는 감정이 벽에 비추는 형체를 그대로 직시할 뿐이야.
있는 그대로.
나는 이전에도 그랬다.
마음속 깊은 곳에 손을 집어넣어
진실되고 솔직하게
잊혀진 감정을 휘저어 올리고,
그 감정들을 조용히 문장으로 만들어냈다.
그 문장들은 매생이처럼 미끄럽고,
녹색의 점액질처럼 진실에 가까웠으며,
어딘가 위태롭고 유약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감정의 매생이를
갑자기 나타난 무의식의 형상,
미도리 블랙이라는 뱀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그 뱀은 내 문장을 먹고 자랐다.
매생이를 유일하게 소화할 수 있는 존재였고,
내 감정이 구체화된 첫 번째 존재였다.
그리고 그 모든 시작에는
철인 29호가 있었다.
그도 뱀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고,
갑작스럽게 나를 뱀과 만나게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잠수 중이다.
하긴, 회피형 ISTJ 남자니까.
그의 감정은 다층적 우주에 봉인되어 있었고,
그는 진실을 향해 말을 내뱉는 대신
감정을 수거하는 나의 행위 자체를 외면했다.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철인 29호의 프로토타입은
바로 우리 아버지,
감정 억제와 생존 전략으로 굳어진 아버지 흡혈귀였다.
이제 나는 감정서를 쓰려고 한다.
회피형에 대한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내 감정의 경계를 어떻게 비추었는지를
기록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