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투명한 사람이 좋다.

내면의 깊이를 다루는 능력과 관계의 윤리에 대하여

by stephanette

*이 글은 이전 글 「자기 과제를 자기 안에서 감당하는 사람이 좋다.」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깊이는 있는데 맑지 않은 사람

내면의 깊이를 다루는 능력과 관계의 윤리에 대하여


우리는 흔히 깊이 있는 사람에게 끌린다. 피상적이지 않은 말, 쉽게 다 읽히지 않는 분위기, 감정과 사유의 층위를 지닌 듯한 인상은 대개 매혹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실제 관계의 장면에서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깊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깊이를 다루는 방식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관계의 안정과 신뢰를 결정하는 것은 내면의 밀도보다도 자기 내면을 관계 안으로 어떤 형태로 가져오는가 하는 태도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한 가지 구별이 가능해진다. 깊은 사람과 깊이를 맑게 다루는 사람은 같지 않다.


이 구별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애착, 경계, 자기조절, 투사, 정서적 성숙과 관련된 매우 구체적인 심리학적 문제다. 어떤 사람은 상처와 복잡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안에서 소화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감정의 총량 자체는 크지 않을지라도, 처리되지 않은 내면을 관계의 장면마다 흘려보내며 타인을 불안하게 만든다. 따라서 한 인간의 성숙은 “얼마나 많이 느끼는가”보다 자신이 느끼는 것을 얼마나 의식하고, 견디고, 상징화하며, 책임 있게 다룰 수 있는가에 의해 더 잘 드러난다.


깊은 사람은 왜 매혹적인가


융(C. G. Jung)은 인간이 타자에게 매혹될 때 대개 그 사람의 실제 모습만이 아니라, 그 위에 투사된 무의식적 이미지에도 반응한다고 보았다. 쉽게 말해 우리는 어떤 사람의 깊이를 볼 때, 그 사람 안의 실재뿐 아니라 내가 갈망하는 내면성의 형상까지 함께 본다. 그래서 깊어 보이는 사람은 종종 특별해 보인다. 그는 아직 다 해석되지 않았고, 다 드러나지 않았으며, 내 안의 사유와 감각을 자극한다. 이런 자극은 지적 호기심과 정서적 긴장을 동시에 만든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깊어 보이는 사람에게 반응하는 마음은 때때로 그 사람의 성숙을 자동적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깊이는 성숙을 보장하지 않는다. 상처가 많은 사람, 사유가 복잡한 사람, 감정의 층위가 두꺼운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다만 그가 그 상처와 복잡성을 자기 책임 아래 두는가, 아니면 그것을 관계 속으로 흘려보내며 타인에게 해석과 수습의 부담을 넘기는가가 결정적으로 다르다.


비온(W. R. Bion)의 개념을 빌리면, 정서적 성숙이란 원초적 감정 요소를 있는 그대로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각 가능한 형태로 변환하는 능력, 즉 컨테이닝(containing)의 능력에 가깝다. 처리되지 않은 감정은 투사되고, 투사된 감정은 관계를 불안하게 만든다. 따라서 깊다는 것은 심연이 있다는 뜻일 뿐이며, 그 심연을 어떻게 담고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파편은 보이는데 전체는 흐린 사람


깊이는 있으나 맑지 않은 사람의 특징은 대체로 분명하다. 그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감각은 예민한 편이고, 타인의 분위기와 미묘한 결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직접 만나면 친밀하게 반응할 수 있고, 순간의 열기나 끌림도 형성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종종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는 표면적으로 둔감하거나 무심한 사람이 아니라, 순간적 친밀감의 장면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다. 이 유형의 사람은 대개 자기 전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어떤 기준으로 움직이는지, 감정이 생겼을 때 무엇을 책임지고 무엇을 회피하는지, 가까워질수록 어떤 윤리와 일관성을 지니는지, 그런 구조적 자기 정보가 드러나지 않는다. 즉, 조각은 보이는데 전체는 흐리다. 친절은 보이나 기준은 보이지 않고, 호감은 느껴지나 책임의 형식은 드러나지 않으며, 순간의 온도는 있으나 관계의 방향은 불분명하다.


애착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흔히 접근과 회피가 교차하는 관계 패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가까이 다가오는 듯하다가 일정 지점에서 물러나고, 친밀감은 제공하되 구조적 확실성은 유예하며, 타인이 확인을 요청하면 그 순간 관계의 밀도를 줄인다. 이런 사람은 노골적으로 지배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자기 감정이 읽히는 것, 혹은 관계의 주도권을 잃는 것을 불편해한다. 그래서 애매함을 유지하며 안전거리를 확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애매함은 피상적으로 보면 부드럽고 무해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관계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명확하지 않은 친밀감은 타인에게 해석 노동을 강요한다. 상대는 계속 묻게 된다. 이 사람이 나를 향해 연 감정은 어디까지인가, 지금의 거리감은 일시적인가 구조적인가, 내가 느낀 친밀감은 실제였는가 아니면 분위기였는가. 즉, 그 관계는 정서적 사실보다 해석의 과로를 낳는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깊이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상대를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깊이와 탁함은 다른 문제다


여기서 핵심은 이것이다. 깊음과 탁함을 구분해야 한다. 깊은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깊다고 해서 모두 맑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안에 심해가 있으나 그것이 표면을 흐리지 않는다. 반면 어떤 사람은 내면의 심해를 감추거나 우회하거나 암시적으로 흘리며, 관계 전체를 흐린 물속으로 끌어들인다.


위니컷(D. W. Winnicott)의 용어를 사용하면, 성숙한 사람은 자기 내면의 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타인 위에 쏟아붓지 않는다. 그는 자기 안의 충동, 상처, 결핍을 거짓 자아의 연출로 덮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무가공 상태의 내면을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방출하지도 않는다. 그는 내면을 다룬다. 이 다룬다는 말이 중요하다. 그것은 감정을 억압한다는 뜻이 아니라, 감정이 관계를 침식하지 않도록 형태를 부여하는 능력을 뜻한다.


그래서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은 대개 이렇다. 그는 겉으로 맑아 보인다. 공연히 감추지 않는다. 자기 안에 깊은 것이 있어도 그것을 타인에게 휘두르지 않는다. 일상에서 상대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고, 자기 심연을 자기 안에서 다룰 줄 안다. 이는 냉담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관계 윤리다. 내면의 복잡성을 이유로 타인의 평온을 침범하지 않는 태도, 바로 그것이 성숙의 징표다.


타인의 심연은 타인의 것이다


아들러 심리학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핵심 중 하나는 과제의 분리다. 이는 흔히 차갑거나 개인주의적인 원리로 오해되지만, 실제로는 관계를 끊는 논리가 아니라 경계를 흐리지 않는 성숙함의 원리에 가깝다. 타인의 심연은 타인의 것이다. 상대 안의 결핍과 상처, 혼란과 불안은 그 사람의 역사이자 과제다. 내가 그것을 공감할 수는 있으나, 대신 처리해줄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대신 처리해주려는 욕망 자체가 때로는 경계 침범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은 냉정하게 멀어지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진정한 친밀감은 서로의 내면을 뒤섞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의 고유성을 존중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 즉 분화된 친밀감 속에서 생긴다. 보웬(Murray Bowen)이 말했듯, 성숙한 관계란 정서적 융합이 아니라 자기분화(differentiation of self)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타인과 깊게 연결되되, 자기 감정의 경계를 잃지 않는 상태. 내가 흔들리더라도 그 흔들림을 타인에게 곧바로 떠넘기지 않는 상태. 결국 관계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애착의 양이 아니라 분화의 수준이다.


나는 타인의 심연에 쉽게 끌려들어가는 성향을 지닌 사람에게서 이 원리의 중요성을 더 절실히 본다.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깊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들의 감각은 정교하고, 타인의 내면적 긴장을 잘 읽어낸다. 그러나 이런 민감성은 축복인 동시에 위험이다. 처리되지 않은 심연을 가진 사람 곁에서는, 이들은 쉽게 타인의 감정 조절 장치가 되거나 타인의 무의식을 대신 해석하는 위치에 놓인다. 그러므로 민감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공감 능력이 아니라, 때로는 경계의 윤리다. 타인의 심연은 타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능력. 그것이 없으면 깊이에 대한 민감성은 곧 소진의 통로가 된다.


정서적 자립이라는 기준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결핍과 상처를 지닌다. 그러므로 성숙의 기준은 상처의 유무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상처를 어떤 형식으로 살아내는가다. 상처를 이유로 타인을 붙잡아 확인받으려 하는가, 불안을 상대에게 전염시키는가, 관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기 내면을 조절하려 하는가. 아니면 그 상처를 인식하고, 견디고, 말과 침묵의 적절한 형식 안에서 다루는가.


나는 후자를 높이 평가한다. 자기 심연을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 정서적으로 자립한 사람이다. 여기서 자립이란 감정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감정을 더 잘 아는 사람이다. 다만 그는 그 감정을 타인을 지배하거나 휘두르는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타인의 존재를 자기 조절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타인을 긴장시키지 않고도 자기 내면을 버틸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관계를 맑게 만든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맑음이다. 맑음은 단순함이 아니다. 무지나 평면성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깊이가 없어서 얻어지는 투명함이 아니라, 깊이가 있으면서도 그것을 흐리지 않는 상태다. 심해를 가졌으되 물을 흐리지 않는 사람. 내면의 밀도를 관계의 폭력으로 전환하지 않는 사람. 나는 결국 그런 사람을 신뢰한다.


깊은 사람보다, 깊이를 맑게 다루는 사람


결국 문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나는 깊은 사람을 좋아하는가. 아마 그렇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이것이다. 나는 자기 깊이를 맑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 이는 단순한 취향의 서술이 아니라, 내가 어떤 관계에서 안심하는지에 대한 심리적 진술이다.


나를 알아본 듯했지만 끝까지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사람, 순간의 친밀감은 주지만 구조적 명확성은 유예하는 사람, 심해를 품고 있으나 그것을 관계 속에 계속 흘려보내는 사람은 결국 피로를 남긴다. 반대로 자기 안의 심해를 자기 안에서 견디고, 타인에게 그것을 증명하거나 과시하거나 전염시키지 않는 사람은 평온을 준다. 그 평온은 얕음의 결과가 아니라 정돈의 결과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것은 더 이상 깊이 그 자체가 아니다. 나는 이제 안다. 깊이는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지만, 맑음만이 사람을 안심시킨다. 그리고 오래 지속되는 관계는 거의 언제나 매혹보다 안심 위에 세워진다.

그 점에서 성숙이란 아마 이런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심연을 알고도 그것을 타인에게 휘두르지 않는 능력.


나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투명함이다.






작가의 이전글자기 과제를 자기 안에서 감당하는 사람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