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지진 경보, 그 남자 006

그 의미보다, 그 말이 그의 얼굴에 어떤 결로 스쳤는지가 더 궁금했다.

by stephanette

그는 정치 이야기를 했다.

그 말 자체는 특별하지 않았다. 너무 흔해서 오히려 방심하게 만드는 종류의 화제였다. 사람들은 대개 그런 이야기를 꺼낼 때 상대와의 거리를 어느 정도 가늠한 뒤에야 입을 연다. 어디까지 밀어도 되는지,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서로가 견딜 수 있는 온도를 대충 계산한 다음에.


나는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는다. 비슷한 결의 사람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화제는 보통 조금 더 나중에 온다. 이미 말의 속도와 침묵의 길이, 농담의 수위와 시선의 결을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열리는 쪽에 가깝다.

그런데도 그날은 이상하게 흐름이 달랐다.

나는 무심한 척 한마디를 던졌다.

"전 그분은.. 별로.. "


말은 조용히 나갔다. 힘을 준 것도 아니고, 특별히 벼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문장이 입 밖으로 나온 직후, 내 안에서 아주 미세한 어긋남이 느껴졌다. 내가 먼저 놀랐다. 이건 내가 보통 쓰는 방식이 아니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할 만큼 함부로 말을 던지는 편은 아니니까.


그런데 그날 밤은 달랐다.

나는 이어지는 내 말을 듣다가 문득 멈칫했고, 거의 반사적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반응이 궁금해서라기보다, 방금 내 입에서 나온 문장이 그의 표면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가 더 궁금했다. 그 말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동의하는지 아닌지는 그다음 문제였다. 이상하게도 그의 앞에서는, 내가 던진 말의 의미보다 그 말이 그의 얼굴에 어떤 결로 스치는지 바라보고 싶었다.


그의 턱 주변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거의 알아차리기 어려운 변화였다. 미소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짧았고, 무표정이라고 하기에는 분명 결이 있었다. 친절함이 먼저 보였고, 그 아래에 약간의 소탈함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둘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남았다. 쉽게 분류되지 않는 표정. 너무 잠깐이라서 더 오래 남는 종류의 것.


나는 이유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입 안이 갑자기 말라 있었다. 그가 내게 대단한 시선을 보낸 것도 아니었다. 노골적인 것도, 의도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몸은 이상하게 먼저 알고 있었다. 아직 오지 않은 무엇을 미리 눈치챈 것처럼. 나는 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이보리 실크 블라우스의 앞섶이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주름이 잡혀 있었고, 손에 잡히지도 않을 만큼 작은 스냅 단추들이 그 사이를 단정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어졌다. 잘 잠겨 있는지. 너무 잘 열리지 않는지. 쓸데없는 확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심장이 아주 얇게 저렸다.


그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대화를 이어갈 줄 아는 사람처럼, 자기 의견을 상대에게 밀어 넣지 않고도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처럼. 바로 그런 점이 더 위험했다. 말의 내용보다 말하는 방식이 사람을 더 오래 흔드는 순간들이 있다. 그는 지금 그런 방식으로 내 앞에 있었다.


나는 괜스레 손가락을 들어 술잔에 맺힌 물방울을 건드렸다.

차갑게 맺힌 작은 방울이 손끝에서 부서졌다. 손가락 끝이 잔의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미끄러졌다. 둥근 입구를 따라 한 바퀴, 반쯤, 다시 조금. 별생각 없는 동작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손끝이 무언가를 붙잡고 싶어 하는 쪽에 가까웠다. 투명하고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 이상하게도 그의 미소가 떠올랐다. 분명 따뜻한 얼굴이었는데, 닿는 감각은 저 유리잔 쪽에 더 가까웠다. 매끈하고, 미끄럽고, 쉽게 잡히지 않는 종류의 표면.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내가 듣고 있는 것은 그의 말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그의 표정을 따라가고 있었다. 방금 전의 미세한 움직임, 짧게 스쳤다가 사라진 결, 친절함 아래에서 한 번쯤 다른 방향으로 기울었을지도 모르는 얼굴의 기류. 그게 궁금했다. 너무 궁금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보다 그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원래 사람의 말속 내용을 먼저 붙잡는 쪽이었다. 문장을 기억하고, 단어의 온도를 나누고, 논리의 결을 따라가는 사람. 그런데 그날 밤에는 순서가 달라졌다. 내용은 자꾸 뒤로 밀려났고, 표정의 질감이 먼저 들어왔다. 말은 흘러가는데 얼굴은 남았다. 나는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이미 그 안으로 조금씩 미끄러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한 번도 닿아본 적 없는 종류의 경계였다. 너무 얇아서 더 또렷한.


나를 흔든 건 대단한 문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너무 평범해서 방심하게 되는 화제,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래 붙잡히지 않을 것 같은 말, 그리고 그 말이 닿는 순간 잠깐 살아나는 얼굴의 결. 사람은 때때로 뜻보다 표정에 먼저 끌린다. 더 정확히는, 뜻이 표정 위를 지나갈 때 생기는 아주 짧은 흔들림에.


그날 밤 내가 본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 내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대화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을 가진 얼굴이 만들어내는 아주 미세한 질감 때문에.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거의 몸으로 닿는 촉감에 가까웠다. 입술의 경계 그 선명하지 않은 윤곽을 따라 손끝에 닿아가는 그런 촉감처럼. 설명하기도 전에 먼저 반응해 버리는 종류의 매력. 그래서 더 위험하고, 그래서 더 늦게까지 남는 것.


나는 다시 술잔을 만졌다.

차가운 물기가 손끝에 묻었다. 그 감촉이 기묘하게 또렷했다. 그를 향해 올려다보았던 시선과, 괜히 블라우스의 앞섶을 확인하던 손끝과, 턱 주변을 스쳐 지나가던 그의 미세한 표정이 한순간에 이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고요한 밤이었다. 그런데도 내 안에서는 아주 작은 균열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오래 남은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 청량한 촉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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