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타고난 능력이 아닌,
훈련이다.

- 이기적인 인간 본성을 거슬러 다른 사람의 우주를 바라보는 방법

by stephanette


"정의는 누구의 입장에서 정의일까?

환경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는 혜택을 누리고 누군가는 기회를 잃는다."


인간중심주의와 생태학에 대해 찾아보다가 생태학이 극단적인 경우, '환경 파시즘(Environmental Fascism)'으로 흐를 수 있다는 글을 읽었다. 'RE100-기업 신재생 에너지 100% 사용 선언(Renewable Energy 100%)'의 파급효과로 인한 이니셔티브로 환경 정의(environmental justice)와 기후 식민주의(climate colonialism) 논쟁이 등장하는 것도 그와 결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당연하게 기후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신재생 에너지 사용이 시급할진대, 그 실현의 방법론은 선진국에게 독과점의 길을 열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RE100은 상대적으로 개도국 즉, 타자의 삶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변질될 수 있다.

나는 아무래도 비관론자이거나 매우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편인가 보다. 경제 발전의 가장 효율적인 방식 중 하나는 '독점'이다. 최장 기간 세계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도 그 경제력은 독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어릴 적, 경제학을 배우면서, 도무지 말도 안 되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지금의 경제체제가 세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 해당 분야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고, 내면적 환멸과 거리 두기로 인해 나는 다른 쪽으로 전공을 변경했다. 아무리 좋은 목표를 세워도 가진 자들이 더 가지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들은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현실에서 비일비재하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플라톤 속 남녀에 대한 이야기를 예로 들지 않아도, 사람은 원래 남녀가 하나였다는 신화를 갖고 있다. 세상 어딘가 있을 그 완벽한 짝을 찾아서 하나가 되고자 하는 바람. 그로 인해 상대방을 만나서 그가 '나에게 꼭 맞을 것'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한다. 이는 자신에게 '맞춰줄 것'이라는 자기본위적 망상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상대방을 '자신의 만족을 충족하기 위한 도구'로 대상화하고 이런 관계는 매우 폭력적이다.

인간의 본성이 그러하므로, 공감은 훈련되어야 한다. 공감은 타고 나는 능력도 짧은 감상도 아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가 가진 생각과 삶의 방향성을 그대로 지켜봐 줄 수 있는 것이 공감이다. 타인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우주에서 살고 있는 존재이다. 같은 가족이라고 해도 자녀 각각이 마주 대하는 부모의 모습은 자녀마다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같은 집에서 자랐다고 해도 집에 대한 이미지는 모두 다 다르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고 해도 사람마다의 세상을 느끼는 온도는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상대방은 완전히 다른 우주 속에서 살고 있다는 배경을 전제한다면, 그 바탕 위에서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다면, 순순히 그 사람의 본성에 따른 삶을 긍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 상대가 어째서 그러한지 즉시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나의 만족과 쾌락과 행복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에 가장 먼저 시선이 향한다. 그 사람만의 우주를 살아가고 있는 상대방에 대해 거리를 두고 지켜봐 주고 공간의 여백을 허용하는 것이 공감의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살아가는 내내 공감은 마치 몸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꾸준히 배우고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공감은 타고 나는 능력도 짧은 감상도 아니다.

공감은 몸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꾸준히 배우고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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