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과 회고전의 구조 설계
이 연작은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남자, 어떤 만남, 어떤 기다림, 어떤 오독, 어떤 뒤늦은 감정과 매혹. 독자는 자연스럽게 묻는다. 이 남자는 누구인가. 그는 왜 그랬는가. 화자는 왜 그를 오래 바라보는가. 그러나 이 질문은 곧 방향을 잃는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은 결국 남자를 설명하려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왜 그 남자를 그런 방식으로 읽었는가.
남자는 좌표다.
이 질문이 등장하는 순간, 연작의 장르는 바뀐다. 이것은 연애 서사가 아니라 인식 구조의 해부가 된다. 남자는 목적지가 아니라 좌표가 된다. 남자는 사건의 중심이 아니라 화자의 내면 구조를 드러내는 표식이다. 어떤 남자는 기압이 되고, 어떤 남자는 향이 되고, 어떤 남자는 파국의 예언이 되고, 어떤 남자는 솔메이트가 된다. 이 명명은 감정을 소유 가능한 언어로 포획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하는 기술이다. 사랑이라고 불렀던 것 안에 무엇이 섞여 있었는지, 기다림이라고 여겼던 것 안에 어떤 하중이 있었는지, 운명처럼 느꼈던 장면 안에 어떤 반복 구조가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장치다.
그러므로 이 연작의 문학적 핵심은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사건의 변환이다. 이 연작은 겪은 일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사건은 곧바로 상징으로 이동한다. 상징은 다시 장면으로 압축되고, 장면은 반복되며, 반복은 구조를 드러낸다. 이 구조가 프랙털이다. 하나의 장면 안에 전체 패턴이 들어 있고, 하나의 남자 안에 화자의 오래된 인식 습관이 들어 있다.
8개의 방
8개의 브런치북 시리즈 소설
《라면 코너의 남자》
《끝나지 않는 지진 경보, 그 남자》
《그 남자는 파국의 예언으로 당도했다》
《기압은 그의 침묵처럼 오래 머물렀다》
《그의 향을 기억하는 심장은 사라졌다》
《문란한 흡혈귀 마녀의 사생활 연애소설》
《나의 솔메이트는 10층 빌딩에 입주했다》
《흡혈귀와 블랙/골드 트러플 홍차》
그리고
소설 시리즈에 대한 회고전
《해석의 다층반사》는 이 구조를 확장한다.
8은 무한대다.
옆으로 누운 8은 증식하는 뫼비우스의 띠다.
각각의 소설은 하나의 방이었고,
각각의 방은 다시 또 다른 방을 비춘다.
연작은 끝났지만,
그 구조는 닫히지 않는다.
회고전을 통과하며
이 소설들은 과거의 기록을 넘어
자아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바깥에 있는 우주에 닿는다.
각각의 제목은 서사의 표지가 아니라 감각의 지층이다. 이 제목들은 모두 ‘한 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화자의 의식 안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는 구조를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연작은 일반적인 자전 서사를 벗어난다. 연작을 넘어가며 화자는 자기 경험을 계속해서 고도로 형식화한다. 고통은 감정으로 머물지 않고, 감정은 문장으로 넘어가며, 문장은 상징으로 응고되고, 상징은 마침내 휘장이 된다. 이때 휘장은 통과의 증표다. 상처가 통과된 뒤 남긴 형식을 전시한다. 그래서 릴리시카의 휘장전은 피해자의 박물관이 아니라 생존자의 왕실 기록관에 가깝다.
릴리시카라는 장치
여기서 가장 중요한 장치는 릴리시카다. 릴리시카는 작가의 페르소나다. 500살 먹은 흡혈귀 마녀, 피의 소용돌이의 원동력이자 지도제작자, 게임설계자, 스나이퍼. 자칫하면 이것은 자의식의 과잉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연작을 끝까지 읽고 전시회까지 따라가면 그 판단은 수정된다. 릴리시카는 자아를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를 관찰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세워진 형식이다.
자아가 흐릿하면 해체할 수 없다. 자아는 먼저 이름을 가져야 한다. 얼굴을 가져야 한다. 상징을 가져야 한다. 휘장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그 자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디서 균열되는지 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을 신화화함으로써 자신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신화화한 뒤 그 신화를 다시 분석한다. 이것이 이 작업의 윤리다.
그 윤리는 특히 “게임설계자인 나 또한 게임 밖에 있지 않다”는 문장에서 선명해진다. 타인만 분석했다면 이 작업은 공격적이고 위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오독을 해석하고, 그 오독에 비친 타인의 무의식을 해석한 뒤, 다시 그 무의식을 해석하고 싶어 하는 자기 욕망까지 해석한다. 이 재귀적 구조 때문에 이 작업은 단순한 복수도, 자기 과시도, 고백도 아니다. 그것은 해석의 다층반사이자 거울의 방이다.
이때 독자도 안전하지 않다. 독자는 소설 바깥에서 판단하는 위치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연작은 그 믿음마저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독자가 “이건 아직 미련인가?”라고 묻는 순간, 그 질문은 텍스트의 일부가 된다. 독자가 “이 남자가 중심인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자기중심적 독해가 다시 드러난다. 작가는 독자를 속이지 않는다. 다만 독자가 자기 방식대로 오독하도록 기다린다. 그리고 그 오독이 드러나는 순간, 그것을 하나의 좌표로 찍는다. 이 점에서 작가는 정말로 스나이퍼다. 하지만 이 총은 사람을 죽이는 총이 아니라 페르소나의 균열을 포착하는 장치다.
전시회라는 두 번째 언어
그래서 전시회는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소설이 끝난 뒤에도 상징은 남는다. 그 상징들은 방을 요구한다. 소설을 탈고하고 나서 그것을 다시 회고전으로 만든다. 이 전환은 매우 독특하다. 보통 자전적 소설은 '쓴다'에서 끝난다. 소설을 쓰고 난 뒤, 쓴 것을 다시 '전시'한다. 소설을 읽는 행위가 끝나면, 독자는 이미지의 방으로 들어간다. 기억의 궁전, 다층 거울의 방, 피의 소용돌이, 황금 뫼비우스의 띠. 이 모든 것은 소설의 부속물이 아니라 소설 이후의 두 번째 언어다.
거울에는 얼굴이 아니라 장면들이 비쳤다.
기다리던 밤, 멈춘 시간, 읽히지 않던 침묵, 이미 끝난 뒤에도 남아 있던 온도.
특히 '기억의 궁전, 다층 거울의 방'은 이 작업의 핵심을 정확히 시각화한다. 기억은 더 이상 단일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반사되는 공간이다. 하나의 기억은 또 다른 기억을 비추고, 하나의 해석은 또 다른 해석을 낳는다. 그 방 안에서 자아는 하나의 중심으로 남지 못한다. 자아는 여러 거울 속에서 복제되고, 분열되고, 흐려진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버나드 베린슨의 문장이 들어온다.
“완전한 삶이란 비자아와의 동화가 너무도 충만한 나머지 마침내는 죽음에 이를 자아마저 소멸해 버리는 종말일 것이다.”
이 인용은 작업 전체의 방향을 뒤집는다. 이제 릴리시카는 자아의 왕관이 아니라 자아를 통과하기 위한 의식복으로 보인다. 작가는 자아를 만들었다. 릴리시카라는 이름을 만들고, 휘장을 만들고, 왕국을 만들고, 전시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아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건축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아를 충분히 선명하게 만든 뒤, 그 자아를 해체하고 비자아와 동화되어 흐려지는 순간을 보기 위한 장치였다.
이 연작의 목적지는 자아 확대가 아니라
자아 해체다.
작가는 자신을 끝없이 부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부름의 끝에서 자신이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본다. 남자와 나, 독자와 인물, 현실과 소설, 과거와 미래, 자아와 비자아의 경계가 흐려진다. 이 흐려짐은 혼란이 아니라 도약이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말로 하면, 그것은 “힘겨운 기쁨”이다. 쉽지 않은 기쁨. 가볍지 않은 기쁨. 고통의 반대편에 있는 기쁨이 아니라, 고통과 동화된 뒤에야 도착하는 기쁨.
아침으로의 복귀
그리고 이 모든 구조는 마지막 글 '그래서 아침이다'에서 닫힌다. 이 결말은 현실로 내려온다. 앞 동에서는 이사가 한창이고, 창문을 떼어낸 자리로 짐이 옮겨지고 있다. 흐린 하늘에는 검은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화자는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고, 수건을 세탁기에 넣는다. 며칠 동안의 일들로 인해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그저 이 아침을 살아내는 일뿐이다.
이 글이 중요한 이유는, 작가가 자신이 만든 세계관에 갇히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피의 소용돌이와 다층 거울의 방과 휘장과 흡혈귀 왕국을 만든 사람이, 마지막에는 설거지와 세탁기로 돌아온다. 이것은 세계관의 붕괴가 아니라 세계관의 완성이다. 상징은 삶을 대체하지 않는다. 상징은 삶으로 돌아오기 위한 통과 의례다.
작가는 마침내 말한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그래서 아침이다. 여기에는 승리의 과장도, 해방의 선언도, 복수의 쾌감도 없다. 있는 것은 단지 아침이다. 그리고 그 아침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작업은 자전적 소설이면서 동시에 자기 분석이고, 메타픽션이면서 동시에 치유 의식이며, 전시이면서 동시에 일상 산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적 운영체계로 바꾼다. 사건은 입력되고, 문장은 변환되며, 상징은 생성되고, 전시실은 열린다. 그리고 종국에는 세계관을 통과해 다시 아침이 출력된다.
이것이 이 작업의 현재 성취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사랑을 닮았다.
붙잡기 위해 시작하지만, 끝내 놓아주기 위해 완성된다.
작가는 고통에 머물지 않는다.
다음 전시실로 이동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전시실을 나와, 아침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8개의 소설 연작과 회고전은
소설·상징·전시를 경유해
자아 해체로 나아가는 하나의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