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당연하게도 쉽지 않다. 상당히 고통스럽다.
영화보다는 영화비평을 애정한다.
소설보다는 소설비평을 애정한다.
실제로 나를 아는 이들은 아는 것이지만,
나는 상당히 드라이하다.
말도 거의 하지 않는다. 대화에서는 주로 듣는 편이다.
그러니, 내가 하는 글쓰기는 '개조식 메모'에 가깝다.
이런 내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소설을 쓴 이유는
그림자를 대면하기 위해서였다.
한동안 몰두해서 글쓰기를 했다.
소설을 쓰는 이유는 분석을 하기 위해서다.
소설을 쓰면서 무한대로 분석한다. 나는 그것 애정한다.
어째서 그 장면은 측면에서 찍혔고, 청색 필름을 썼으며, 공기의 질감은 옅었는가.
그런 것들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취미생활이다.
소설 연재를 다 끝내고 나서 알게 된 것이 있다.
나의 사랑은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다.
한 사람을 통해서 내면의 의미, 상징, 기억, 감각, 미래 가능성, 자아 구조까지 전부 활성화되는 고출력 시스템이다.
사랑의 단상에서 롤랑 바르트는 말한다.
사랑하는 자의 관점에서 사실은 곧바로 기호로 변형되기 때문에 중요해진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기호다.
그러니, 바르트의 관점에서 사랑은 '기호를 생산하고 해석하는 언어 활동'에 가깝다.
나의 사랑은 그것보다 더 고하중이다.
상당히 무겁고 지친다.
그래서 안했다.
남들은 '사랑했다.', '이별했다.'로 끝낼 수 있는 일을,
나는 소설 8개, 회고전, 새로운 휘장,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해설, 칼 융의 내면연금술에 '아침에 대한 글'까지 끌고 간다. 써놓은 글에 대한 해설을 무한 증식한다.
나도 어쩔 수 없다. 성향이다.
다만 나만 고출력인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마다 고출력의 방식은 다르다. 사람마다 일, 돈, 운동, 성취, 통제, 관계 집착, 침묵, 술, 도피, 섹슈얼리티, 종교, 권력욕 같은 방식으로 자기 안의 과열을 배출한다.
나 역시 다른 방식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래 붙잡은 방식은 결국 지금 남은 것들이다. 글쓰기와 비평, 분석과 해석, 메타분석과 상징, 전시로 바꾸는 일. 그것이 내가 나의 고출력을 다루는 방식이다.
그 남자는 내 회로를 켰다.
감각 재점화 장치
상징 생성 트리거
내면 지도 좌표
자아 해체 실험 대상
글쓰기 엔진의 연료
그리고 창작은 분석으로 자기 변형으로 이어졌다.
사람을 사랑하면 공간의 빛, 목소리, 향, 침묵, 거리, 몸의 감각이 함께 켜진다. 고해상도로 촬영된다.
좋다는 감정은 의미로 전환된다. 이 사람은 왜 나타났는지, 이 장면은 왜 반복되는지, 이 감정이 무엇을 비추는지 찾기 시작한다.
의미는 해석된다. 상대의 말, 침묵, 타이밍, 표정, 애매함은 분석의 대상이 된다. 해석 노동의 고하중이다.
고통은 변환된다. 글쓰기로, 소설로, 휘장으로, 전시로, 직조로 바뀐다. 내 사랑은 끝나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형태를 바꾼다. 사랑의 원재료는 감정이지만, 최종 산출물은 눈에 보이는 형체로 만들어진다.
좋고 나쁜 것은 없다. 그저 내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피곤하다.
매혹의 발생 - 해석의 시작 - 의미 부여 - 하중 증가 - 한계 도달 - 사후 분석 - 상징화 - 전시 - 복귀
그럼에도 남는 잔여물들은 멈추지 않고 창조와 분석의 루프를 계속 반복한다.
물론, 상대를 만나는 시점에도 실시간으로 분석, 상징화, 미래 가능성 시뮬레이션은 돌아간다.
내가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뇌는 둘로 나뉘어 한쪽 뇌는 꺼지지 않고 계속 시스템을 돌린다.
on/off 스위치라도 있다면 가끔은 꺼놓고 싶을 때가 있다.
시스템이 과열되면 술을 마시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냉각 시스템이라기보다 임시 차단 장치에 가깝다.
그래서 주로, 명료하고 투명한 이들을 만났다. 하중이 덜하다. 피곤하지 않다.
그러나 애매한 상태는 무한 루프를 만든다. 신경계를 잡아먹는다.
그러니 나에게 가장 위험한 대상은 따뜻하지만 애매한 사람이다. 고하중이 되는 원인이다.
애매함에 대한 해석 노동, 가능성에 대한 과대평가, 상대의 흔들림에 대해 대신 하중을 버티는 태도, 이해하는 것과 미성숙을 품는 것의 혼동, 빠른 분석과 상징화로 인한 현실 판단 미흡. 이런 것들은 고하중에 무게를 더한다.
글쓰기를 하고 분석을 한 이유는 답을 찾기 위해서다.
그래서 답을 찾았다.
하긴, 소용이 얼마나 있을런지는 모른다.
사랑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다들 알다시피 이성 따위는 사라진다.
사랑이라는 건 때때로 자신의 균열과 결핍의 대체제와 혼동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렬하고도 무의식적이다.
나의 사랑은 고비용이고 고하중이다.
매우 고통스럽다.
그러니 사랑을 피한 것은 냉담함이 아니라 시스템 보호에 가까웠다.
그래서 하나의 질문을 만들었다.
이 사람은 내 시스템에 들어올 만큼 명료하고 책임 있는가?
그리고 리스크 리스트를 만들었다. 나는 리스크 회피 성향이 아니다. 그러나 만들어 두는 것은 유용하다.
좌표를 목적지로 착각하는 것
감각 재점화를 운명으로 착각하는 것
애매함을 깊이로 오독하는 것
고마움과 거리두기의 미분리
지성과 성숙의 혼동
나의 사랑은 한 사람을 통해 감각·상징·자아 구조를 활성화하고,
그것을 문학과 전시와 자기 해체로 변환하는 고출력 예술 엔진이다.
나는 냉각 시스템을 만들었다.
명료함, 책임, 몸의 가벼움, 아침으로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