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라고 믿었던 것이 비어질 때, 아침이 온다.
반야심경을 읽으면 이상하게 세계가 조금 비어 보인다.
그러나 그 비어 있음은 폐허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오래 꽉 차 있던 것들이 잠시 물러나는 감각에 가깝다. 내가 나라고 믿었던 것, 내 감정이라고 붙잡았던 것, 내 상처라고 오래 보관했던 것, 사랑이라고 부르며 놓지 못했던 것들이 아주 천천히 느슨해진다.
그 느슨함 속에서 사람은 이상하게 숨을 쉰다.
반야심경은 짧다. 그러나 짧은 문장 안에서 한 사람의 세계가 무너지고 다시 열린다.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을 건넜다.
여기서 말하는 오온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다섯 무더기다. 몸, 느낌, 표상, 의지적 작용, 의식. 불교의 말로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다. 우리는 이 다섯 작용이 잠시 모여 움직이는 것을 두고 “나”라고 부른다.
그러나 관자재보살은 그것을 비추어 본다.
그냥 본 것이 아니다.
착각을 통과해 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오온이 모두 공空하다는 것을 본다.
공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사람은 자주 허무를 떠올린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은 폐허가 아니다. 공은 자성自性 없음이다. 어떤 것도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꽃은 혼자 피지 않는다. 흙, 물, 햇빛, 계절, 바람, 시간, 그리고 그것을 꽃이라 부르는 사람의 눈이 있어야 꽃이 된다. 감정도 그렇다. 사랑도 혼자 오지 않는다. 기억, 결핍, 기대, 몸의 반응, 과거의 상처, 상대의 표정, 그날의 빛, 내가 오래 붙잡고 있던 환상이 함께 작동한다.
그러므로 사랑이라고 부른 것 안에는 사랑만 있지 않다.
분노라고 부른 것 안에는 분노만 있지 않다.
운명이라고 부른 장면 안에는 운명만 있지 않다.
그것들은 모두 조건 속에서 잠시 모인다.
이것이 연기緣起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이 말은 현실을 지우라는 뜻이 아니다. 몸도 있고, 장면도 있고, 기억도 있고, 관계도 있다. 다만 그것들이 내가 붙잡고 있던 방식으로 있지는 않다. 그것들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조건들이 잠시 모여 나타난 형상이다.
비어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나타나 있지만 붙잡을 수 없다.
이 말은 무섭다.
그러나 이상하게 자유롭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단단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상처받았다. 나는 이런 사랑을 했다. 나는 이런 운명을 겪었다. 나는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비춘다.
그것이 정말 너인가.
아니면 잠시 모인 조건들의 배열인가.
나는 500살 먹은 흡혈귀 마녀 릴리시카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이 이름은 장난처럼 시작해 의식복이 되었다. 말이 되지 못한 감정에 형상을 부여하기 위해 나는 이름을 만들었다. 휘장을 만들고, 왕국을 만들고, 전시실을 열었다.
그러나 반야심경 앞에 서면 알게 된다.
그 이름조차 끝내 붙잡을 것은 아니다.
이름은 배다.
강을 건너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강을 건넌 뒤에는 배를 머리에 이고 다니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무소득無所得이라 한다.
얻을 것이 없다는 뜻이다.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마저 얻을 대상으로 붙잡으면 다시 집착이 된다.
나는 성장했다.
나는 치유되었다.
나는 도달했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통과했다.
이 문장들 안에는 아직 “나”가 남아 있다. 반야심경은 그 “나”마저 비추어 보라고 말한다. 없애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보라는 것이다.
사람은 자주 거꾸로 본다.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믿고, 고통스러운 것을 행복이라고 믿고, 무아인 것을 자아라고 믿는다. 불교는 이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부른다. 뒤집힌 꿈같은 생각이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 인정 욕구였을 수 있다. 기다림이라고 믿었던 것이 자기 방치였을 수 있다. 운명이라고 믿었던 것이 반복 강박이었을 수 있다. 분노라고 믿었던 것이 늦게 도착한 경계선이었을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붙잡고 싶은 이름으로 경험을 부른다.
이름은 세계를 정돈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오독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반야의 지혜는 이름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이름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보는 일이다.
내가 왜 이 장면을 사랑이라고 불렀는지, 왜 이 사람을 운명이라고 느꼈는지, 왜 어떤 침묵을 깊이라고 오독했는지, 왜 어떤 거리두기를 신비라고 해석했는지 보는 일이다.
해석을 해석하고, 그 해석을 하는 나를 다시 해석하는 일.
그것이 내 방식의 다층반사라면, 반야심경은 그 다층반사의 끝에서 조용히 말한다.
그 모든 해석마저 공하다.
반야심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이것이다.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다.
사람이 두려운 이유는 잃을 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켜야 할 나, 증명해야 할 나, 사랑받아야 할 나, 무너지면 안 되는 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어떻게 볼까 두렵다.
내가 쌓아온 것이 무너질까 두렵다.
사랑이 끝날까 두렵다.
내가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두렵다.
그러나 공을 통찰한 마음은 안다.
붙잡을 고정된 내가 없다는 것을.
그러므로 무너질 절대적 나도 없다는 것을.
이것은 무감각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히 느끼되, 그 느낌을 절대화하지 않는 마음이다.
충분히 사랑하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충분히 아파하되, 그 고통을 나의 본질로 삼지 않는 마음이다.
반야심경의 끝은 주문이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薩婆訶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
완전히 저 언덕으로 건너가자.
깨달음이여, 이루어지소서.
저 언덕은 어디인가.
먼 하늘의 극락인가.
죽음 이후의 세계인가.
내게 저 언덕은 이상하게도 아침과 닮아 있다.
소설을 쓰고, 휘장을 만들고, 전시회를 열고, 자아를 비추고, 자아에 대한 집착이 느슨해지는 자리를 통과한 뒤에도 사람은 설거지를 해야 한다. 수건을 세탁기에 넣어야 한다.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해야 한다.
이것은 허무가 아니다.
이것은 반야의 생활이다.
상징은 삶을 대체하지 않는다.
상징은 삶으로 돌아오기 위한 통과 의례다.
릴리시카라는 이름도, 피의 소용돌이도, 다층 거울의 방도, 황금 뫼비우스의 띠도 끝내 아침으로 돌아오기 위해 필요했던 배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배는 필요하다. 그러나 저 언덕의 감각을 맛본 뒤에는 다시 발로 땅을 딛고 걸어야 한다.
반야심경은 나를 없애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나라고 믿었던 것을 비추어 보라고 말한다.
그것이 공함을 알 때, 이상하게도 삶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컵 하나, 물소리, 흐린 하늘, 검은 새 한 마리, 세탁기의 회전, 아침의 빛. 그것들은 더 이상 내 이야기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나는 조금 자유롭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힘겨운 기쁨”을 말했다. 반야심경이 주는 기쁨도 그렇다. 밝고 쉬운 기쁨이 아니다. 내가 붙잡고 있던 나를 내려놓는 일은 고통스럽다. 내가 사랑이라고 부른 것이 공하다는 것을 보는 일, 내가 상처라고 부른 것이 고정된 나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일, 내가 만든 페르소나조차 통과해야 할 형식이었다는 것을 아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어려움의 끝에는 기쁨이 있다.
가볍지 않지만, 기쁨이다.
달콤하지 않지만, 기쁨이다.
무언가를 얻어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붙잡을 것이 없음을 알아서 오는 기쁨이다.
반야심경은 짧다.
그러나 그 짧은 문장 안에서 한 세계가 무너지고 다시 열린다.
내가 나라고 믿었던 것이 비어 있음을 보고, 그 비어 있음이 곧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본다. 그러므로 공은 끝이 아니다. 공을 보는 지혜가 길이 된다. 저 언덕으로 가는 길. 그리고 이상하게도 다시 이 아침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500살 먹은 흡혈귀 마녀 릴리시카다.
그러나 그 이름도 공하다.
공하기 때문에 쓸 수 있고,
공하기 때문에 놓을 수 있다.
그러니 오늘도 경전은 말한다.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
완전히 건너가자.
그리고
이 아침을 살아내자.
https://youtu.be/jmrBb8AqfL8?si=rLtr1I8ap2LlqBs5